[뉴스토마토 최용민 기자] 지난해 미르·K스포츠재단 문제로 촉발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문재인 대통령’ 탄생으로 일단락됐다. JTBC의 태블릿PC 보도가 ‘비선실세’ 의혹에 기름을 부었고, 시민들은 광화문 광장으로 쏟아져 나와 촛불을 들었다. 국회는 촛불 민심의 뜻을 이어 받아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켰고, 헌법재판소도 빠른 인용 결정으로 촛불 민심에 화답했다.
그리고 60일. 역대 대통령 선거 중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우리는 마침내 정권교체라는 시대적 소명을 완수했다. 많은 국민들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꿈을 품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아직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 삶은 여전히 그대로 고통 속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 탄생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인 것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일파만파
박근혜 정권의 ‘비선실세’였던 최순실 이름이 구체적인 국정개입 정황을 통해 언론에 처음 등장한 것은 지난해 9월 한겨레 보도였다. 조선일보는 그 이전 7월과 8월 보도를 통해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이 청와대 도움을 받아 기업들로부터 800억원이 넘는 금액을 모금할 수 있었다고 폭로했다. 이어 한겨레가 이 재단의 실질적인 주인이 바로 ‘비선실세’ 최순실이라고 보도한 것이다. 최씨가 자신의 단골 마시지 업소 주인을 K스포츠재단 이사장으로 임명했다는 내용이다.
의혹이 일파만파 확산되자 박 전 대통령은 9월24일 국회에서 ‘개헌’ 카드를 들고 나와 국면 전환을 시도했지만, 그날 밤 JTBC가 보도한 ‘태블릿PC’로 모든 상황은 역전됐다. 최씨가 사용했던 태블릿PC 안에 각종 청와대 문서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의혹으로 남아 있던 ‘비선실세’ 존재가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순간이었다. 이날 국민들이 받은 충격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다음날 박 전 대통령은 다급하게 1차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지만, 국정은 걷잡을 수 없는 암흑 속으로 빠져 들었다.
'비선실세' 최순실이 8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삼성 430억대 뇌물' 7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광화문 촛불 집회로 민심 폭발
JTBC 보도 이후 첫 주말인 9월29일 광화문에는 첫 촛불 집회가 열렸다. 그동안 ‘비선실세’ 의혹에 대해 반신반의하던 국민들이 태블릿PC 존재로 모든 의혹을 사실로 받아들인 것이다. 특히 박 전 대통령이 1차 대국민 사과문 발표에서 청와대를 들어온 이후 최씨에게 도움을 받지 않았다고 밝혔지만, 후속 보도 등을 통해 정권 출범 이후에도 꾸준히 최씨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성난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매주 광화문에 모였고, 지방에서도 대통령의 탄핵을 요구하는 민심이 요동쳤다. 3만명(이하 주최 측 추산)으로 시작된 촛불 집회는 11월5일 20만명으로 급증했고, 11월12일에는 100만명이 촛불을 들었다. 해외 언론들은 평화로운 촛불 집회를 집중 조명하며 새로운 시위 문화를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촛불 집회는 결국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 냈고, 조기 대선을 통해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 촛불 집회는 누적인원 1600만명을 기록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4주년을 맞은 2월 2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 주최로 '박근혜 4년, 이제는 끝내자! 2.25 전국집중 17차 범국민행동의 날'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국회 통과
촛불 집회를 통해 민심을 확인한 정치권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통과를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당시 야당 의원 171명이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공동 발의했고, 12월 9일 본회의 표결이 진행됐다. 결국 이날 본회의에서 국회의원 300명 중 찬성 234표, 반대 56표, 무효 7표, 기권 2표로 박 전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통과됐다. 탄핵안 표결은 제안 설명에 이어 찬반 토론이나 의사진행 발언 없이 곧바로 진행됐다. 투표는 차분히 진행됐고, 탄핵안 통과가 발표될 때 아무런 소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난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 통과 당시 국회 본회의장에서는 몸싸움이 크게 일어났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정당 역사상 처음으로 보수당 분열이 일어났다. 당시 새누리당 내 친박(친박근혜) 세력을 비판하고 야당과 함께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주도한 의원 29명은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바른정당을 창당했다. 이들은 따뜻한 보수, 깨끗한 보수를 표방하며 낡은 세력과 결별하고 진정한 보수로 거듭나겠다고 창당의 의미를 밝혔다. 그러나 추가 탈당을 이끌어내지 못해 세력 확장에 실패하면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새누리당 의원 중 60여명이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찬성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나머지 30여명은 잔류를 선택했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12월9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대통령(박근혜) 탄핵소추안' 통과를 선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헌법재판소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헌법재판소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한 직후 곧바로 심리에 착수했다. 헌재는 강일원 헌법재판관을 주심으로 선정했고, 박 전 대통령 측에 1주일 내로 탄핵소추안에 대한 답변서를 제출하라고 요청했다. 헌재는 1월3일 첫 변론을 열었지만, 박 대통령의 불참으로 5일 본격 심리에 들어갔다.
문제는 선고 시기였다. 당시 박한철 헌재소장과 이정미 재판관의 임기가 각각 1월말과 3월13일에 끝나는 상황에서 자칫 선고가 이들 퇴임 이후로 미뤄질 경우 7인 체제로 선고가 이뤄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7인 체제로 선고를 해도 9인 체제 과반인 6인 이상이 찬성해야 인용이 결정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칫 결과가 왜곡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를 알고 있었던 박 전 대통령 변호인단도 시간을 끌기 위해 판결 지연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히 박 소장 퇴임 이후 헌재소장 대행을 맡은 이 재판관은 자신의 임기가 끝나기 전인 지난 3월10일 박 전 대통령 파면을 만장일치로 판결했다.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이 3월10일 서울시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를 내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19대 문재인 대통령 탄생
헌재의 박 전 대통령 파면 이후 정국은 곧 바로 대통령 선거 체제로 바뀌었다. 헌법은 대통령 궐위 시 60일 안에 후임자를 뽑도록 명시하고 있다. 본격 대선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많은 후보들이 유권자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먼저 국정농단 이전부터 강력하게 차기 대선 후보로 거론된 인물은 지난해 12월말로 임기를 마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었다. 반 전 총장은 귀국 직후 대선 행보를 이어가며 지지율 끌어올리기에 나섰지만, 귀국 3주 만에 돌연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때부터 반 전 총장을 지지했던 중도보수층 표심이 표류하기 시작했다.
이후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에 대한 중도층과 보수층의 기대감이 커졌다. 이 때문에 황 권한대행이 대선에 직접 뛰어드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왔지만, 황 권한대행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헌재의 파면 직후 국무회의에서 대선 불출마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후 더불어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안희정 충남지사가 중도층의 지지를 받으면서 급부상했지만, 문재인 대통령 당선인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민주당 경선 분위기는 그대로 본선까지 이어졌고, 문재인 대세론은 대통령 당선으로 최종 확인됐다.
최용민 기자 yongmin03@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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