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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이정현 대표의 ‘단식모독’
유승찬 스토리닷 대표
2016-09-27 13:42:43 2016-09-27 13:42:43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
 
집권당 대표가 정세균 국회의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단식이라는 극단적인 투쟁수단을 선택한 것이다. 이 대표는 2년 전 “단식이 국회의원 특권의 시작”이라는 말을 했었다. 만약 그들이 야당일 때 집권당 대표가 단식을 했다면 어떻게 말했을까? 특권의 시작이 아니라 특권의 결정판이라고 했을까?
 
헌정사상 초유의 일들이 자꾸 벌어지는 것은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것도 생산적인 일이 아니라 극단적 대결의 정치에서 자꾸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은 정치가 수준 이하의 쇼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누구를 위한 쇼인가. 하물며 그것이 국민이 아니라 대통령에게 잘보이기 위한 것이라면 이것은 매우 심각하다.
 
집권당 대표의 단식은 한마디로 ‘나라를 맡겼더니 파업을 하는 꼴’이다. 이는 독재정권에 항거하기 위해 23일 간의 목숨을 건 단식을 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닦아온 단식투쟁의 가치를 모독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아가 비공개 단식투쟁이라는 말은 언어조합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정치적 수양이나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정부의 역할을 감시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의 제안을 위한 중요한 자리인 국정감사가 파행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국회의장의 미숙한 발언이 빌미가 되었다고 해도 이 파행의 원인 또한 집권당의 책임이 가장 크다. 원래는 일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아 야당이 보이콧을 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상례다. 집권당 대표는 국정수행을 돕기 위해서라도 타협하고 양보하면서 국회운영의 본류에서 이탈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바쁜 가운데 총선에 참여해서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한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다. 명분 없는 싸움은 전원 공격에 나선 축구팀의 뒤가 허망하게 뚫리듯이 커다란 약점을 갖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언론의 양비론은 옳지 않다. 전통적 의미에서 야당은 반대하는 정당이고 여당은 참고 또 참으며 자신들이 내세운 정책과 공약을 야당을 설득해 실현해 나가는 숙명을 갖는다.
 
이번 국회 파행 과정에서 빚어진 또 하나의 나쁜 선례는 집권여당이 김재수 장관 해임건의안 통과를 막기 위해 정부 장관들을 끌어들인 것이다. 집권 여당이 스스로 국회의 권위를 붕괴시킨 사건이다. 이른바 ‘필리밥스터’로 귀결된 이 희귀한 사건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풍자적이다. 왜 여당은 당당하게 해임건의안이 부당한 이유를 밝히는 대신에 밥먹을 시간을 달라고 읍소한 것일까? 국회의원이 저녁밥 먹는다는 명분으로 장관의 해임건의안을 막으려 한 것을 국민들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해당 이슈에 대한 명분을 잃는 순간 정치의 존재가치는 지속성을 잃고 가뭇없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정현 대표는 아주 열정적인 정치인이다. 그가 호남에서 당선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지역주의 정치에 파열구를 냈다고 칭찬했다. 정치인이 자신의 정치지도자에 대해 로열티를 갖는 것은 대체로 미덕에 속한다. 충성심은 정치의 본질을 규정하는 한 요소다. 하지만 그가 청와대 수석일 때와 집권당 대표일 때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치적 재앙이다. 이는 자칫 맹목적 충성의 오류에 빠지게 되며 그 오류는 충성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 불충이 되는 현상을 초래할 가능성마저 존재한다.
 
막스 베버는 정치가의 자질로 열정, 책임감, 균형감각을 들었다. 이 가운데 이정현 대표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열정에 대한 항목을 살펴보는 것은 자못 흥미롭다. 베버는 정치가의 열정은 단순히 주관적인 흥분상태가 아니라 어떤 대의에 대한 뜨거운 확신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대의의 근거는 개인적,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것이기 때문에, 대의에 대한 헌신은 객관적 태도라고도 했다.
 
“권력추구가 ‘대의’에 대한 헌신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성을 결여한 채 순전히 개인적 자기도취를 목표로 하는 순간, 그때부터 정치가라는 직업의 신성한 정신에 대한 배반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같은 주관적인 열정은 무책임성을 수반한다. 지금 국정감사를 송두리째 파행으로 몰고가고 있는 단식투쟁은 정치적 무책임성으로 이어지며 여야 대결구도를 극단적인 상태로 만들어 정치적 균형감각마저 잃게 만드는 행위인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는 북핵문제, 경주지진을 비롯해 저출산, 저성장, 청년실업 등 열거하기 어려운 난제들을 마주하고 있다. 국민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가득하다.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된 백남기 농민에 대한 진상조사와 책임자 규명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지금 우리는 우리 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도 있는 그런 시기를 보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인이 열정과 책임의식, 균형감각을 잃어버리고 오직 권력을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권력정치가’의 길로 들어서면 어떻게 될까? 베버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자.
 
“비록 권력은 불가피한 수단이고 권력지향은 모든 정치행위의 추동력 가운데 하나이지만, 아니 오히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벼락부자처럼 자신의 권력에 대해 허풍을 떨며 권력도취에 빠져 허영에 찬 자화상에 몰두하는 짓거리 등, 순전히 권력 그 자체를 숭배하는 모든 행태는 정치력을 왜곡시키는 가장 해로운 행태입니다.”(직업으로서의 정치, 나남)
 
권력의 중요성을 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권력의 허망함과 무의미함을 깨닫는 일이기도 하다. 굳이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이란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그렇다. 박근혜 정부의 시간도 어느덧 임기말을 향하고 있다. 지금 모든 문제를 다 끌어안고 경직된 권력을 행사하려 하기보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유연하게 문제해결에 나서는 것이 더욱 현명한 판단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일정한 양보가 필요하고 협치의 모델을 만드는 게 더욱 중요하다.
 
영화 <밀정>에서 정채산(이병헌)이 밀정에게 건네는 대사가 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어디에 올려야 할지를 정해야 할 때가 옵니다. 당신은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리겠습니까?”
 
이정현 대표가 자신의 장점인 열정을 보다 넓은 정치적 상상력의 마당에서 더욱 마음껏 펼치기 바란다. 오늘이라도 단식을 중단하고 고 백남기 농민의 빈소를 다녀오는 것은 어떨까?
 
유승찬 스토리닷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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