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찍(whip). 의회정치의 원조인 영국 하원에서는 원내대표를 사냥할 때 하운드 견을 몰고 가는 것에 비유한다. 국회는 회의체 기구로 행정부의 계서제(hierarchy) 조직과 달리 자율적인 의원들의 합의로 움직인다. 행정부는 원칙적으로 상명하복 질서가 있지만 의회는 동등한 권한을 가진 의원들 간 합의가 우선하는 조직이다. 그래서 영국 의회에서는 원내대표를 사냥 때 개성이 강한 하운드 견을 목표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에 비유해 행정부의 수장보다 더 고도의 정치적 능력이 필요하다고 봤다.
제20대 국회가 개원을 앞두고 원 구성부터 난항이다. 이번 국회는 그 이전 국회와 다른 정당 간 의석분포를 보인다. 과거 국회의 관행이 적용될 수 없는 새로운 정치 상황이다. 의회와 행정부 간의 관계는 분점정부(divided government)로 집권당인 여당과 국회의 제1당이 서로 달라 대통령의 입법 리더십은 어느 때보다 취약하다. 더구나 어느 정당도 과반을 넘는 다수당이 나오지 않아 원 구성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정당이 없다.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한 세 정당 간 황금분할이 이루어져 제3당이 어느 때보다 캐스팅 보트를 쥘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20대 국회는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나타난 4당 체제와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당시는 민정당이 과반을 넘는 다수당은 아니었지만 다른 정당보다 훨씬 많은 의석을 보유한 제1당이어서 국회의장을 민정당에서 뽑기로 했다. 대신 상임위원장은 다수결주의가 아니라 원내교섭단체의 협상에 의해 배분하는 관행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13대 국회 이후 제1당이 과반의석을 넘는 다수당이 되더라도 상임위원장은 원내교섭단체 간의 협상에 의해 배분이 이루어졌다. 이는 다수당이 상임위원장 등을 비롯한 입법부 리더십을 독점하는 미국의 의회제도와 확연히 차이 나는 점이다.
원래 의회에서는 관행과 관습법이 어느 조직보다 중요하게 간주된다. 백지상태에서 법률과 제도를 만드는 것이 의회가 가진 고유한 기능인데, 선례가 없을 때는 협상과 타협이 표 대결보다 먼저 이루어진다. 다수결보다는 정치적 합의를 끌어내는 것이 소수에 대해 배려이고 유권자의 대표성을 확보하는 데 더 바람직한 제도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번 20대 원내대표들은 그 어느 때 국회보다 높은 자율성을 확보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8월 하순에 있을 전당대회까지 비상대책위원회 체제고, 새누리당은 원내대표가 비대위원장을 겸하고 있다. 그동안 원내정당화를 꾸준히 주장해 왔지만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당 대표에 의해 원내대표의 자율성이 상당한 제약을 받았다. 그런데 20대 국회는 지금까지의 국회와 달리 제1당, 2당이 모두 전당대회를 통한 당 대표가 부재한 상태에서 말 그대로 '휘프(whip)'가 원 구성을 주도할 수 있다. 국민의당에서도 신생 정당의 특성상 다선 원내대표의 협상력이 막강하다.
원 구성을 위해 원내대표는 대내(internal) 협상과 대외(external) 협상으로 ‘두 차원의 게임(two level game)’을 주도한다. 원내대표들은 협상 테이블에서 얼굴은 상대 원내대표를 보지만 사실은 그 뒤에 있는 소속정당 의원들을 더 의식하고 있다. 당선자들의 회의에서 뽑힌 초임 원내대표들은 원 구성협상에서 우위를 점해야 앞으로 1년 동안 대내 협상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원내 대표들은 이 첫 번째 협상에 밀리지 않으려고 초강수를 둘 수밖에 없다. 이 처음 협상에서 밀린다고 대내적으로 평가받으면 그 뒤에는 원내대표로서 입지가 급격히 위축될 것이기 때문이다.
원 구성 협상에서 이들은 ‘명분’과 ‘실리’의 절충점을 찾게 될 것이다. 더민주는 선거결과에 의한 제1당으로서 국회의장직을 가져가는 명분을 취할 수밖에 없다. 새누리당은 명목상으로 의장직을 고집하고 있지만 결국은 ‘실리’를 쫓아가는 상식을 따를 것이다. 의장직을 내놓는 대신 법제사법위원회뿐만 아니라 운영위원회 위원장까지 요구하는 실리를 챙기는 것이 수순으로 보인다.
그러나 관성에 젖어 있는 새누리당은 현실적 실리보다는 행정부와의 관계 등을 고려해 의장직을 고집할 가능성이 여전히 열려있다. 더구나 청와대의 개입이 있다면 원 구성 협상은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다. 두 정당이 원만한 협상안을 만들어 내지 못하면 국민의당만 캐스팅 보터로서 입지가 강화될 것이다.
시간을 끌면 원 구성협상은 법정시한을 넘기고 시민들은 세 정당 간의 원 구성을 이전투구로 이해할 것이다. 협상안을 도출해 내지 못하고 표 대결로 국회의장을 뽑게 되면 20대 국회는 처음부터 국민적 신뢰 상실하고 출발할 것이다. 그리고 그 국민적 지탄의 대상은 우선 원내대표들이 된다.
원 구성 협상에 원내대표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대내 협상과 대외 협상보다 이를 지켜보고 있는 국민들의 눈이다. 20대 국회의 출발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결국 원내대표들의 손에 달렸다. 원만한 합의를 끌어내는 것이 이번 국회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확보하는 첫걸음이고 원내대표들의 정치적 성장을 위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대내 협상이라는 작은 정치에 휘둘리지 말고 국민적 신뢰를 구축하는 의회의 채찍 같은 원내대표들을 기대한다.
임채원 서울대 국가리더십센터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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