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복기(復棋), 그리고 하사비스
2016-03-17 09:50:31 2016-03-17 09:50:31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그게 2016년 3월이 될지는 몰랐다. 어디에선가 볼 수 있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그게 한국이 될지는 상상도 못 했다. 기현상이 벌어졌다. 컴퓨터로 오목이나 가끔 두던 나 같은 바둑 문외한도 TV로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봤다. 대화의 주된 메뉴도 온통 기계와 인간의 두뇌 싸움이었다. '알파고가 도대체 어느 고등학교냐', '차라리 덕선이를 출전시키자'는 김빠진 농담으로 시작한 대화는 진지한 질문으로 끝을 맺었다. '인공지능(AI)이 인류를 지배하는 날이 오는 거야?'
 
그런데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결 내내 나의 눈길을 끈 것은 알파고가 아니었다. 알파고를 개발한 구글 딥마인드의 대표 데미스 하사비스였다. 그는 1976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이세돌이 바둑 천재였듯 그는 체스 천재였다(13세의 나이에 챔피언에 오른다). 17세에 시뮬레이션 게임 '테마파크'를 개발해 수백만 개를 판매했다. AI의 위력에 눈뜬 하사비스는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본격적으로 인지신경과학(뇌과학)을 공부한다. 2007년 발표한 그의 논문은 그해 과학 전문지 사이언스 선정 10대 과학성과에 이름을 올렸다.
 
하사비스는 2010년 인공지능 스타트업 딥마인드를 설립했고, 구글은 2014년 약 6700억 원을 주고 딥마인드를 인수한다. 게임 '덕후'에서 인공지능 전문가로, 스타트업에서 굴지의 대기업 계열사로, 하사비스와 딥마인드 자체가 하나의 성공 스토리가 된 것이다. 이런 그가 알파고의 상대로 세계 1위가 아니라 세계 4위의 이세돌을 선택한 것은 당연해 보인다. 세계 1위라는 타이틀보다 바둑 천재 이세돌이라는 스토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들의 선택은 옳았다. 1대 4로 패했지만, 끝까지 포기할 줄 모르는 이세돌 9단의 열정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사람을 이긴 AI를 미워하는 대신, AI에 맞서 물러서지 않는 사람에게 기꺼이 박수를 보냈다.   
AI가 사람을 이기는 모습을 2016년 3월 한국에서 목격하게 될지는 몰랐지만, 그 이후에 펼쳐지는 모습은 익숙하다. 국내 AI 연구 현황과 관련 산업계 동향을 파악하고 AI 진흥 대책이 나온다. 컨트롤 타워를 만들고 이 부처에서는 연구를, 저 부처에는 산업을 발전시키겠다며 지원책을 쏟아낸다. 잘 됐으면 좋겠다.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자주 봤던 모습이기 때문이다. 빅 데이터, 3D 프린터, 드론 등도 그랬다. 변한 게 없다. 변한 것은 포털에서 AI를 치면 조류 인플루엔자 대신 인공지능이 연관 검색어 상위에 뜬다는 사실 뿐이다.   
 
바둑의 판국을 분석하기 위해 처음부터 그대로 다시 놓아보는 것을 복기(復棋)라고 한다. 분위기에 편승해 성급한 정책을 쏟아내기 전에 AI 연구개발과 산업 정책에 대한 복기도 필요하다. 그동안 컨트롤 타워가 없어서 우리가 못 한 것은 아니다. 관 주도의 대규모 기술 개발보다 게임 덕후가 인공지능 전문가로 성장하고, 스타트업에서 굴지의 대기업 계열사로 오를 수 있는 생태계부터 조성되어야 한다. 게임을 사회적 마약으로 보는 시선이 변하지 않고, 국경 너머의 스마트폰과 메신저를 찾게 만드는 정책이 계속되는 한 ‘한국형 알파고’는 헛구호에 불과하다. 인공지능보다 더 무서운 것은 틀린 줄 알면서도 그것을 반복하는 우리의 무지다.
 
김형석 과학콘텐츠스토리협동조합 스쿱(SCOOP)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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