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여야가 선거구 획정안에 전격 합의했다. 지역구가 253석으로 7석 늘었고, 비례대표는 47석으로 7석 줄어들었다.
지난 22일까지만 해도 합의는 불투명했고 그것에 기초해 이 글을 썼다가 다시 수정을 거듭한다. 이는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정치적 불안정성을 반영한다. 선거구 획정이 헌법재판소가 정한 기일을 한참 넘겨 표류한 것은 새누리당이 국가정보원에 대 테러 정보수집권을 주되 견제장치를 마련한 테러방지법 수정안을 선거구 획정안과 연계 처리를 고집한 탓이다.
테러방지법은 국민의 인권 문제가 걸린 심각한 법안이고 이 법안은 여야의 밀실합의가 아니라 국민적 공론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이번 총선에서 공약으로 내걸고 국민적 심판을 받는 것도 한 방법일 터이다. 즉 테러방지법을 둘러싼 논란, 국정원에 무소불위의 권한을 줄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선거개입의 오명을 쓴 국정원의 환골탈태 혁신이 전제돼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어쨌거나 테러방지법은 테러방지법이고 선거법은 선거법이다. 선거법 개정을 볼모로 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키려 했던 여당의 태도는 두고두고 비판받을 소지가 많다.
민주주의는 다양성을 존중하며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그것을 충분히 고려해 될 수 있는 한 구체적으로 쪼개어 법안을 만들어가는 엄격한 법치주의를 전제로 실현된다. 여기서 다수결의 원리를 존중하되 소수자의 권리를 외면하지 않는 것이 성숙한 민주주의다. 민주주의 실현의 절대적 기준은 헌법이다. 모두가 알 듯이 법률은 헌법 아래에 존재한다. 그런데 여당이 헌재 판결을 거의 휴지조각으로 만들면서까지 성격이 전혀 다른 두 개의 법안을 연계 처리하려고 시도했던 점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되기 어렵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박형준 국회 사무총장은 총선 연기를 경고했다. 박 사무총장은 그는 "선거구 획정은 선거법 자체의 문제보다 여야가 다른 쟁점법안에 대한 태도가 문제”라고 했다. 그는 2월29일까지 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총선 연기를 심각하게 검토할 상황이 온다고 경고했다. 23일 여야 대표의 전격 합의로 파국을 피했지만 이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선거구 획정이 뒤로 밀리면서 선거와 관련된 거의 모든 사무는 무정부상태에 빠졌다. 중앙선관위의 매우 주관적인 판단만이 유일한 기준이 됐다. 선관위를 탓하려는 게 아니다. 국회가 헌법을 정치적 노리개로 삼으면서 벌어진 매우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들도 이런 사태를 충분히 예견했을 텐데 왜 이 지경까지 온 것일까. 현역 기득권 세력의 노림수가 잠재해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선거구 획정을 뒤로 미룰수록 현역 국회의원에게 유리하다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예비 후보자로 등록한 정치신인들은 ‘선거운동 같은 선거운동 아닌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특히 정치신인은 이 같은 상황에서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알리는 것조차 버거울 수밖에 없다.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두 거대 정당이 정치혁신을 외치는 것은 희대의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정치신인에게 가산점을 준다는 뻔한 레퍼터리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를 위한 최소한의 원칙과 기준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언론 인터뷰에서 "서울은 성동구와 중구가 합구될 것으로 보이는데 성동구에서 예비후보로 등록한 사람은 엄밀하게 따지면 중구에서 선거운동을 하지 못하게 돼 있다. 선거에 나가야 되는데 지역구민들도 못 만나보는 게 말이 되느냐. 정치 신인들이 불이익을 받고 나아가 선거운동이 제약을 받는 것은 불공정행위"라고 비판했다. 정확한 지적이다. 말도 안되는 불공정행위가 대의민주주의 최대 행사인 국회의원 총선에서 버젓이 자행돼 온 것이다.
가까스로 선거구 획정에 합의했지만 각 정당의 후보자를 선출하기 위한 당내 경선도 비정상적으로 치러질 수밖에 없다. 벌써부터 모든 경선이 선관위가 제공한 안심번호를 기준으로 한 여론조사로 진행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모두가 알듯이 여론조사는 유권자의 투표행위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여론조사는 여론의 흐름을 알아보기 위한 참고자료일 뿐이다. 대표자를 뽑는 선출행위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사회과학적으로 봐도 여론조사에서 오차범위 내에 있는 결과는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 그것의 함의를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자유지만, 오차범위 내에 있는 경선 결과는 또 얼마나 큰 부작용을 낳겠는가.
여야 정당의 기득권 셈법으로 헌법재판소가 정한 선거구 획정 기일을 54일이나 넘긴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다. 이로 인해 국민들은 후보자를 알 권리, 당 후보자를 뽑을 권리 등을 이미 심각하게 침해받고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최고 헌법기관의 판결을 무시하는 꼼수와 편법이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러졌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여야 정당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총선을 앞두고 벌어진 국민의 참정권 침해를 어떻게 보완할지 그 해법을 내놔야 할 것이다.
유승찬 스토리닷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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