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매달 100만원이 지급된다면?…주목받는 핀란드의 '보편기본소득' 실험
기존 복지 혜택은 폐지…생산성 향상 여부 관심
2015-12-17 15:17:06 2015-12-17 15:17:06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매달 100만원 정도의 소득이 생기면 어떨까. 대신 의료보험이나 양육수당, 노령연금과 같이 정부에서 제공하던 모든 복지 혜택은 사라진다. 100만원으로 생활이 가능하다면 굳이 힘든 노동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추가 소득을 위해 일을 그만두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개인의 노력에 따라 수입이 달라지는 셈이다. 이처럼 이상적인 구상을 현실에서 볼 수 있을듯 하다. 북유럽의 대표적 복지국가로 꼽히는 핀란드에서 모든 국민에게 기본 소득을 보장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한 것이다. 핀란드의 새로운 실험에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된다. 
 
핀란드는 지난 4월 출범한 중앙당 연정 주도로 전국민에게 매달 800유로를 지급하는 보편 기본소득 정책 도입을 검토 중이다. 사진은 총선 승리가 확정된 후 미소를 짓고 있는 유하 시필레 총리의 모습. 사진/뉴시스·신화
 
지난 6일(현지시간)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핀란드 정부가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매달 800유로(약 103만원)를 지급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직업이 있고 없고, 돈이 많고 적고, 여성이고 남성이고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동일한 금액을 지급하겠다는 구상이다. 대신 종전에 제공되던 모든 복지혜택은 폐지된다. 텔레그래프는 이 같은 정책이 10%에 육박하는 핀란드의 실업률을 낮춰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업급여보다 낮은 임금을 받고 일을 하느니 차라리 구직을 포기하는 사례가 지난 몇 년간의 실업률 상승에 상당부분 기여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책 아래에서는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해 노력하는 만큼 더 많은 소득을 얻을 수 있어 자발적으로 노동 시장에 참여하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라고 텔레그래프는 설명했다.
 
기본소득, 복지·생산성 두 마리 토끼 잡기
 
핀란드가 도입하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빈곤선 이상의 삶을 살 수 있는 만큼의 소득을 보장하는 '보편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은 조건을 따지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지급되는 대신 돈의 사용처도 제한하지 않는다. 구직을 개인의 의지에 따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노동자의 자유와 평등을 증진시킬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누구에게 복지 혜택이 필요한 지 선별할 필요 없이 일괄적으로 수당이 지급되기 때문에 관료 행정 기구가 불필요해 정부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사회 구성원들에게 기본 소득이 지급되면 구매력이 늘어나 내수가 증진되고 나아가 지역 격차도 해소할 수 있다.
 
핀란드 정부가 노리는 것도 이 부분이다. 노동에 대한 인센티브를 제공할 수 있는 보다 효율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동시에 관료주의를 줄이고 복잡한 복지 시스템을 간소화하려는 것이다. 보편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는 지난 4월 중앙당 연정이 출범하면서 본격화됐다. 국민기업이라 불렸던 노키아의 몰락과 주요 수출 상대국인 러시아 경기 침체의 여파로 핀란드 경제도 4년째 위축되고 있는 상황에서 강도 높은 개혁만을 유일한 돌파구로 봤기 때문이다. 이를 이끌고 있는 유하 시필레 총리는 비용절감과 노동시장 개혁 등 내부 평가절하 방안을 강조하고 있다. 유로존에 속해 있는 탓에 통화가치 조정을 통한 경쟁력 확보가 어려우니 다른 요소에서 대안을 찾겠다는 의도다. 19개 유로존 국가 중 7번째로 높은 노동비용을 2019년까지 5% 낮추는 등 최하위 수준의 노동생산성을 끌어올리는데 집중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시장 참여율을 높이는 것이 중요한데, 기본소득 정책이 해결책으로 지목됐다. 최저 임금 대신 정부의 보조를 선택해 노동 시장에서 멀어졌던 이들을 유인할 수 있으면서 교육, 헬스케어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시행되는 복지 비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핀란드 정부는 현재 사회보장보험청(KELA) 산하에 연구팀을 꾸려 보편 기본소득에 대한 예비 연구를 진행 중이다. 보편 기본소득 정책을 어떻게 시행해야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조사를 하고 내년 봄부터는 부분적으로 이행됐던 모델도 함께 검토할 계획이다. 하반기 중 그간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한 최적 모델을 설계해 2017년 새로운 정책 실험을 시작한다.
 
보수·진보 모두에게 지지…효과도 긍정적
 
핀란드가 보편 기본소득을 전면 도입한다면 선진국 중에서는 첫 사례가 된다.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처음이다. 그러나 이들이 기본소득의 구상까지 처음 한 것은 아니다. 기본소득의 이론적 시초는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페인의 철학자 후안 루이스 비베스는 '구빈문제에 관한 견해'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최소 소득을 지급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 발상은 프랑스 계몽 사상가 몽테스키외의 저서 '법의 정신'에서는 "국가는 모든 시민들에게 안전한 생활수단, 음식, 적당한 옷과 건강을 해치지 않는 생활 방식을 제공할 책임이 있다"라고, 미국 독립의 지도자 토머스 페인의 '농업의 정의'에서는 "국가 기금을 조성해 남녀를 불문하고 21살이 되는 국민에게 15파운드를 지급하며, 50살이 넘은 국민에게는 매년 10파운드를 지급한다"는 내용 등으로 구체화됐다. 이후 존 스튜어트 밀, 버트런드 러셀 등을 거쳐 '사회 배당'의 개념으로 발전한 기본소득은 1962년 밀턴 프리드먼이 주장한 '음의 소득세'로 이어졌다. 기본소득은 보수와 진보 모두에게서 지지를 받는다는 점이 특징인데,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하는 복지이면서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 하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이 정책적으로 응용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중후반부터다. 1969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가족부조계획'을 구상했다. 모든 복지 프로그램을 없애는 대신 노동자 가족이 적정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도록 현금을 직접 지급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이는 상원 의회의 거부로 최종 폐기 됐으나 1972년 민주당의 대선 후보 조지 맥거번의 공약으로 재등장하는 등 끊임없이 정치권의 관심을 받아왔다. 1982년에는 미국의 알래스카주가 보편 기본소득을 도입했다. 석유로 쌓은 막대한 부가 모든 주민들에게 돌아가길 바란 제이 하몬드 주지사의 발상에서 비롯됐다. 알래스카영구기금(APF)을 설치하고 알래스카주에 1년 이상 공식적으로 거주한 모든 사람들에게 매년 일정한 배당을 지급했다. 배당 초기 300달러 수준이었던 금액은 2008년에는 2000달러를 뛰어넘었다. 정책 효과도 좋았다. 2002년의 한 통계에 따르면 과거 10년간 미국 전역 상위 20%의 평균 소득이 26% 증가할 때 하위 20%의 소득은 12% 증가에 그친 반면, 알래스카에서는 상위 20%가 7%, 하위 20%가 28%의 소득이 늘었다.
 
긍정적인 결과가 확인된 실험은 이 뿐만이 아니다. 캐나다 매니토바주 남서부에 위치한 인구 8500명의 도시 도핀은 1974년부터 6년간 'Mincome'이라 불리는 기본소득을 지급했다. 빈곤없는 마을이란 이름으로 진행된 이 프로젝트에서 입원 치료 비율이 크게 줄었다. 정신 건강이나 사고로 인한 진료가 현저히 감소했다. 브라질에서 2003년부터 실시되고 있는 볼사 파밀리아는 수혜 대상이 350만가구에서 1130만가구까지 늘어났는데, 이 기간 브라질의 지니계수는 0.58에서 0.55로 개선되는 추세를 보였다.
 
재원 조달 문제 걸림돌…국가부채 급증 우려
 
이 때문인지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기본소득 정책에 우호적인 성향을 보였다. KELA에 따르면 지난 9~10월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 핀란드 국민의 70%가 보편 기본소득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초와 지난 2002년의 설문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얻은 것으로 확인됐다. 프랑스에서도 60% 가량의 국민이 기본소득 구상에 긍정적인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보편 기본소득을 이상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재원 조달이라는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헬싱키타임즈 등에 따르면 540만명의 국민들에게 매달 800유로를 지급하기 위해서는 1년에 5200만유로의 재원이 필요하다. 영유아나 10대를 제외한 성인들에게만 기본소득을 보장한다고 해도 4700만유로가 소요된다. 2016년도 핀란드의 정부 예상 수입이 4910만유로 정도임을 감안하면 결코 만만치 않은 규모다. 핀란드 정부가 이를 위해 2년간 2000만유로의 예산을 별도로 책정해 뒀지만, 재정에 대한 우려를 해소시키기에는 충분치 않다. 더욱이 핀란드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부채 비율이 유럽연합(EU)의 상한선인 60%를 넘었다는 사실은 경계감을 높인다. 핀란드의 국가신용등급이 여전히 최고 수준인 트리플A를 유지하고 있지만 부채 규모가 두 배로 증가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란 중앙은행의 경고를 간과할 수 없다.
 
김진양 기자 jinyangkim@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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