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 볼 일 없는 남자 네 명이 있다. 파리에 사는 알렝, 라방, 칼리방, 샤를이 그들인데, 이들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친구들이다. 젊음이 손을 흔들며 지나가버린 중장년층이며, 삶을 결산한 결과 성공적인 성취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이들은 서로 쌍둥이들처럼 닮았다. 쿤데라는 이 비루한 네 남자에게 각각의 주제부를 할당하고 '참을 수 없이 존재가 가벼워지는' 소동극을 완성케한다.
쿤데라의 이전 작품들이 아이러니한 역사적 상황을 통해 삶의 허방을 특유의 철학적 집요함으로 겨눠, 독자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게 했다면, 14년만의 신작인 이 소설은 죽음, 가난, 죄의식과 관련된 남자들이 등장해 인형처럼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즐겁고 흥겨운 쪽에 가깝다.
이 소설은 여러 개의 짧은 장들로 이뤄진 매우 짧은 소설이다. 짧은 소설 속에 담긴 것은 긴 시간이 흐른 뒤 단절이라고 부를 만큼 과거와는 다르게 변해버린 현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다.
이 소설을 끌고 가는 것은 지나간 세대에 속하는 네 명의 남자, 그리고 '스탈린'이다. 주인공들은 '스탈린의 자고새이야기'를 알게 된다. 이 이야기는 스탈린 통치 후 십일년간 소련의 최고 권력자였던 흐루시초프가 '회고록'에 적었던 스탈린과의 우스꽝스러운 일화다. 일화는 스탈린을 폭로하기 위해 인용됐지만, 이 소설에는 스탈린이 직접 출연해 자신의 자고새 이야기가 농담이었다고 주장한다.
쿤데라가 대표작인 <불멸>에서 괴테를 차용해와 작가적 상상력을 동원해 역사적 인물의 내면과 일화의 뒷면을 재구성했던 것과 흡사하다. 이는 작가의 해석일 뿐이지만 스탈린이 나와서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독재자의 주장(실제로는 작가의 주장)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윤리적 딜레마에 빠지게 하면서, 스탈린 자체를 농담으로 만들어버려 역사를 무(無)로 느끼게 하는 효과를 동시에 달성한다.
하지만 이 소설이 지난 세대의 유토피아를 조롱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유토피아가 가버린 뒤 환상 없는 세계의 끔찍함과 다음 세대와의 다름을 맞닥뜨리면서 느끼게 되는 곤궁함을 어떻게 견딜 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견디는 것 이상으로 '좋은 기분을 느끼는 방법'을 찾아나서는 얘기다.
주인공들은 거의 다 실패하는데, 특히 사랑에서 그렇다. 예전의 사랑이 "개인적인 것, 모방할 수 없는 것의 축제, 유일한 것, 그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는 것의 영예"였다면 이제 사랑의 표상은 애인의 배꼽과 같은 것이다. 배꼽은 탯줄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복제를 떠올리게 한다. 애인의 몸은 특별한 나만의 장소가 아니라 계속 반복해 태어나는 인류를 생각나게 하는 죄책감의 장소다.
한없는 무의미해짐 속에서도 이들은 소멸하지 않는데, 그것은 '하물며 죄가 없는데도 먼저 사과하기'와 각별한 우정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 또 이들은 자기 자신의 (무)의미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이들의 소동은 관조하면서도 동시에 참가하고 있는 생의 마지막 축제처럼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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