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연극 <1984>
조지 오웰이 소설 <1984>에서 대중매체의 지배를 받는 암울한 미래로 상징한 1984년은 사실 별다른 특이사항 없이 지나가버렸습니다. 1984년이 되던 해, 백남준이 몇몇 나라에 동시 생중계한 위성 TV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오히려 이런 상황을 대변하는 ‘사건’이 됐습니다. 당시 백남준은 '조지 오웰이 절반만 맞았다'고 반박하고 미디어아트를 통해 대중매체의 긍정적인 사용법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백남준 이후로 덧 없이 시간이 또 흘렀습니다. 올해는 그 문제의 1984년으로부터 30년이 지난 해인데요. 아이러니하게도 이번에는 백남준의 관점을 재반박하는 듯한 연극이 나왔습니다. 바로 연극 <1984>이 그 주인공인데요. 이 발칙한(?) 연극을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연극계의 이단아’로 꼽히는 윤한솔 연출가와 극단 그린피그입니다.
사실 연극 <1984>는 조지 오웰과 백남준 중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주기보다는, 두 예술가의 시각을 통합해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통찰을 시도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연극은 조지 오웰이 소설 속에 그린 디스토피아를 다루는 동시에, 백남준이 사용한 대중매체를 무대에 재인용해 '사회적 발언'을 합니다. 1984년 백남준의 발언, "예술가의 역할은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다"와 비교하자면, 윤한솔 연출가의 연극 <1984>는 마치 "예술가의 역할은 현재를 통해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라고 강변하는 듯합니다.
(사진제공=두산아트센터)
◇ 1984는 현재이자 미래
연극 <1984>를 두고 윤 연출가는 “공연시간을 줄이지 않기 위해 노력한 작품”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원작 중 따옴표 안에 있는 글들만으로 구성됐는데도 공연이 깁니다. 소설이 원작인 까닭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연출가는 관객이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 속에서 고문 당하도록 의도한 듯합니다. 소설 <1984>에서 극단적인 전체주의 사회의 독재권력으로부터 고통 받는 주인공 윈스턴의 기분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요.
극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무대 뒷편을 메우고 있는 여러 대의 텔레스크린이 포착됩니다. 허구적 인물인 ‘빅 브라더’가 직접 묘사되지는 않지만 빅브라더의 감시만큼은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한 장치입니다. 연극은 텔레스크린 외에 사상경찰, 마이크로폰 등이 개인의 일거수일투족까지 감시하고 있는 상황을 그리는데요. 카카오톡 검열 논란 등 뒤숭숭한 우리 사회 현황과 맞물린 때문인지 이러한 감시와 통제가 일반 관객에게도 그리 낯설지만은 않게 다가옵니다.
획일화된 사회를 묘사하는 장면도 눈에 띕니다. 주인공 윈스턴과 줄리아를 비롯한 극중 인물들은 공산품처럼 줄지어 서서 무대 전면에 깔려 있는 무빙워크로 이동합니다. 무대 왼편의 일터에 도착해서는 열 맞춰 놓인 의자에 앉아 동일한 손동작을 하며 기계화된 노동자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또 가로로 긴 무대 정면에는 침대, 싱크대, TV, 테이블, 의자 등이 놓여 있는데, 배우들은 모두 삭발을 하고 흰색 정장을 입은 채 이 공간을 누빕니다. 개성 몰살이라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이미 개인의 공간에까지 침투하고 있습니다.
바닥에 놓인 TV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전송되고 있습니다. 이어 공연 중간중간 84년도 강변가요제를 비롯한 당시의 대중문화 콘텐츠를 다룬 프로그램들이 계속해서 TV화면에 흐릅니다. 콘텐츠를 무한히 틀어대는 TV를 보고 있으면 맨 처음 극장에 들어섰을 때 무심코 지나쳤던 공연의 인트로 장면이 다시금 생각납니다. 공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한 배우가 무대 오른 편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다 넘어지고 아무렇지 않게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는데요. 이 모습은 같은 함정에 빠지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기에 바빠 계속해서 반복된 실수를 하는 인간의 역사를 마치 거울처럼 반영하고 있습니다.
(사진제공=두산아트센터)
◇ 소설과 비슷한 듯 다른 결말
원작의 경우 윈스턴은 모진 고문과 세뇌를 받은 끝에 연인마저 배반하고 당이 원하는 것을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소중히 여겨야 할 모든 가치를 상실한 채 빅 브라더를 사랑하게 되고, 조용히 총살형을 기다립니다. 비관적인 결말이지요. 하지만 소설보다 더 암울하게 끝날 것만 같던 연극 <1984>는 소설과 달리 끝내 인간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그 희망을 향한 표현의 중심에는 노래가 있습니다. 인간을 향한 연민과 사랑이 담긴 노래 말입니다.
당은 당원들을 사상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과거를 날조하고 심지어 인간의 기본 욕구인 성욕까지 통제하는데요. 여기에 반발해 윈스턴은 줄리아를 따라 지하단체인 ‘형제단’에 가입했다가 그만 함정에 빠져 사상경찰에 체포되고 맙니다. 사상경찰은 윈스턴에게 전라로 거울 앞에서 서서 초라한 자신을 마주하게 하기도 하고, 사상교육을 행하는 등 갖은 모욕을 줍니다.
이 모든 상황이 벌어지는 동안 무대 한쪽 구석에서 간헐적으로 전자기타 연주와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극중 등장인물과 무관한 이 기타리스트는 중간중간 허스키한 음색의 노래로 극에 끼어드는데요. ‘미래가 아프게 하나요. 많이 지내봤잖아요. 과거가 아프게 하나요. 남은 건 없잖아요.’ 라는 노랫말이 윈스턴의 암울한 상황과 오버랩 되어 구슬프게 울려퍼집니다.
좀 더 희망에 가까운 것은 윈스턴의 마지막 노래입니다. 사상교육을 받던 중 가장 두려운 것을 대면하는 101호 방 장면. 원작의 경우 윈스턴은 그토록 끔찍하게 싫어하던 쥐로 고문 받으며 줄리아를 배반하게 됩니다. 그런데 연극 <1984>에서는 쥐 소리로 위장된 철창 안에 사실은 연인 줄리아가 갇혀 있으며 윈스턴이 줄리아를 배반한 직후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자신의 민낯을 내보인 윈스턴은 그 후 소설 속 윈스턴과는 다르게 반응합니다.
조금은 뜬금 없지만 총살 직전 그는 공연 초반 TV를 통해 흘러나온 1984년 강변가요제 대상곡 'J에게'를 부릅니다. 이 노래는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줄리아에게 바치는 마지막 노래입니다. 때때로 억압에 굴종하고 배신자가 되는 수모도 겪지만 그의 노래는 그의 정체성을 끝끝내 증명하고 맙니다. 아무리 통제하려고 해도 사람의 진심까지는 어찌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윤한솔 연출가가 연극 <1984>를 통해 도출해낸 희망이 아닐까요. 원작과 원작자의 무게 탓인지 공연이 완벽하게 다듬어지지 못했다는 인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그 희망과 저항의 메시지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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