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연극 <먼 데서 오는 여자>
가을에는 연극 공연이 유달리 많습니다. 이른바 성수기에 해당하는 시즌인데요. 축제에 어울리는 이 계절, 이 공연 저 공연 돌아보느라 소개가 좀 늦었습니다. 연극 <먼 데서 오는 여자>. 2009년 <하얀 앵두>, 2010년 <벌>에 이어 배삼식 작가와 김동현 연출가 콤비가 다시 한 번 의기투합해 만든 작품입니다. 궁합이 잘 맞는 두 사람의 작품인 만큼 공연 전부터 세간의 기대를 모았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어제, 그러니까 28일 막을 내린 이 작품을 뒤늦게나마 소개하고 넘어가려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올해의 주요 작품 중 하나로 꼽힐 게 분명해 보이는데다 머지 않은 시일 내에 재공연할 확률도 꽤 높아 보이기 때문이죠. 이번에 <먼 데서 오는 여자>의 무대가 된 대학로 게릴라 극장은 모처럼 발 디딜틈 없이 꽉 찼습니다. 객석이 모자라 공연 후반부에는 보조석까지 놓아가며 공연할 정도였으니까요.
(사진제공=코르코르디움)
이 작품은 기억에 대해 말하는 연극입니다. 인생에서 두고두고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기억인데 사느라 바빠 그만 잊어버렸던 경험, 다들 한두 가지씩 가지고들 계시겠지요? 이 작품은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노년의 한 여자를 통해 잊어서도 안 되고 잊을 수도 없는 기억이 있다고 간접적으로 설파합니다. 개인으로서나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이 있다고 말이지요.
◇먼 데 있던 기억을 부르다
극의 등장인물은 나이 든 노부부, 단 두 명입니다. 병 들어 기억을 잃어가는 여자, 그리고 그런 아내를 보살피는 남자가 주인공인데요. 겉모양새만 보면 슬프디 슬픈 드라마 한 편이 펼쳐질 것 같지만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수십년의 세월을 때로는 함께, 때로는 따로 떨어져 보낸 ‘여자’와 ‘남자’는 각자 개인인 동시에 현대사를 대표하는 ‘우리’의 모습으로 비칩니다. 50여 년을 아등바등 살아온 여자와 남자의 잊지 못할 기억이란 게 다름 아닌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사진제공=코르코르디움)
세월 속에 묻혀 있던 기억들은 먼저 여자의 말에 의해 되살아납니다. 여자의 병이 먼 데 있던 기억을 지금, 여기로 불러오는 촉매 역할을 하는 셈이지요. 자꾸 앞으로만 흘러가려는 삶 혹은 역사에 브레이크를 거는 게 개인의 질병이라니 어쩐지 야속하기만 한데요. 여자의 무의식이 불러낸 기억은 다름 아닌 ‘먹고 사는 게 너무 중요해서’ 자꾸만 잊혀지는, 아니 잊고 싶어지는 아픈 상처의 기억입니다.
◇먼 데서 지금, 여기로
기억은 여자와 남자의 말을 빌어 지금에서 먼 것부터 차례로 무대에 소환됩니다. 남자의 기억 속에는 월남 파병, 중동 건설현장 등 고된 돈벌이와 견디기 힘든 고독이 있습니다. 여자의 기억도 고된 것이기는 마찬가지지만 결이 조금 다릅니다. 6.25전쟁과 식모살이, 쫓기듯 시작한 청계천 봉제공장의 시다 생활, 돈 때문에 남동생을 외면한 일 등 생활 때문에 그만 덮어둔 부끄러움이 여자를 괴롭히지요.
‘먼 데서 오는’ 서로 다른 기억은 관객 각각의 경험치에 따라 여러가지 감정의 파동을 빚어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무대와 어느 정도 객관적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말입니다. 남자가 극 중에서 여자에게 자신이 모르던 기억이 있음을 알게 된 후 하는 말처럼, 관객은 어느 순간까지는 ‘그랬었구나, 왜 말 안했어, 말하기 싫으면 하지마, 안 해도 돼’ 라는 태도로 머물 수 있거든요.
그러다가 결국 결정적인 순간이 오고야 맙니다. 먼 데서 오던 기억이 지금, 여기와 근접한 지점까지 다다르기 때문입니다. 무대에 마침내 함께 공유하는 기억이 당도합니다. 어쩌면 남녀 주인공이 때때로 펼쳐내는 모노드라마로 치부할 수 있었던 남의 기억이 우리의 기억으로 넘어가는 순간입니다.
(사진제공=코르코르디움)
우리의 기억이란 바로 2003년 대구 지하철 중앙로역에서 벌어진 참사의 기억입니다. 극중 부부에게는 대구 소재의 대학에 진학할 예정이었던 딸을 참사로 잃은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희한하게도 이 대목에서 관객은 자연스레 지난 4월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됩니다. 세월호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는데도 말입니다. 두 참사가 놀랄 만큼 비슷한 양상으로 발생했고, 수습됐으며, 잊혀졌다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 관객은 여자가 과거에 느꼈던 수치심은 이제 오롯이 관객의 것이 됩니다.
최근의 기억을 소환해낸 이후, 그러니까 남자가 혼자 남은 순간부터 대본의 흐름이 다소 급작스럽게 전환되는 점이 아쉽긴 합니다. 이야기가 조금은 설명조로 전개되거든요. 하지만 배우 이대연의 섬세한 연기가 놀라우리만큼 큰 뒷심을 발휘합니다. 끝까지 깔끔하게 마감되는 연출력도 극의 완성도를 한껏 높이는 역할을 하지요. 여자 역의 이연규 배우가 선보이는 깊은 내공의 연기와 더불어 극단 코끼리만보의 앙상블 역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연극에서 자주 접하곤 했던, 개인과 사회공동체의 기억이라는 화두가 모처럼 설득력 있게 펼쳐진 점이 반갑습니다.
- 공연명 : <먼 데서 오는 여자>
- 시간 : 2014년 9월12~28일
- 장소 : 게릴라극장
- 작 : 배삼식
-연출 : 김동현
- 제작 : 극단 코끼리만보
- 출연진 : 이대연, 이연규
이 뉴스는 2014년 10월 2일 ( 18:39:49 ) 토마토프라임에 출고된 기사입니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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