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의 불이 켜지면 관객은 방금 본 로봇을 마음에 담은 채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 로봇은 용감했거나 섬뜩했거나 애처로웠다. 어느 쪽이든 관객은 무언가를 느끼며 극장을 나선다.
이튿날 아침, 그 관객이 건물 로비에서 배송 로봇과 마주친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먼저 지나가라고 손짓해야 할까, 인사를 건네도 될까, 못 본 척을 해야 할까. 어젯밤 영화에서 본 어떤 장면도 이 순간의 답이 되어 주지 못한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들 한다. 허구의 로봇이 현실의 로봇을 대하는 태도까지 바꾸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로봇을 직접 겪어 보지 못한 사람에게 로봇은 먼저 이야기 속 존재로 다가온다. 그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영화와 책, 게임 같은 이야기에 나오는 로봇, 곧 로봇 캐릭터를 많이 기억할수록 로봇을 더 잘 알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지식과는 다른 무언가가 먼저 자리를 잡는 것일까.
미국 텍사스테크대학교(Texas Tech University)의 한 연구자가 2020년 5월 발표한 논문이 이 물음을 설문으로 풀었다. 연구자는 미국 거주자 410명에게 로봇이 무엇이고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먼저 자기 말로 적게 했다. 이어 인쇄물, 영화와 텔레비전, 게임에서 기억나는 로봇 캐릭터를 매체마다 세 개까지 적게 하고, 캐릭터마다 얼마나 선한지와 얼마나 공감이 가는지를 일곱 단계로 매기게 했다. 마지막으로 실제 로봇이 자신이 하는 일을 소개하는 영상 한 편을 보여 주고, 그 로봇이 감정을 느낀다고 보는지, 믿을 만한지,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이겠는지를 물었다.
설문 결과는 기대를 비켜 갔다. 로봇을 설명한 응답 가운데 79퍼센트는 사람과 견주어 사람이 아닌 존재라는 점을, 77.6퍼센트는 일을 해내는 기계라는 점을, 71.5퍼센트는 프로그램으로 움직인다는 점을 담고 있었다. 이 설명은 캐릭터를 얼마나 기억하는지, 그 캐릭터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와 이어지지 않았다. 기억한 캐릭터가 많든 적든, 선하게 보든 그렇지 않든, 로봇을 설명하는 내용에 뚜렷한 차이가 없었다.
반면 영상 속 로봇에 대한 평가와 이어진 것은 캐릭터의 수가 아니라 호감이었다. 기억한 캐릭터를 선하게 보고 공감하는 마음, 곧 호감이 큰 사람일수록 영상 속 로봇이 감정을 느낀다고 보았고, 더 믿을 만하다고 보았고,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이 관계가 아주 강하지는 않았지만 우연이라고 넘기기는 어려운 정도였다. 연구자는 캐릭터에게 쌓인 호감이 실제 로봇을 만났을 때 꺼내 쓰는 어림짐작이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로봇이 무엇인지 아는 것과 로봇에 대해 갖는 느낌이 따로 움직일 수 있다는 해석이다.
연구자는 이 결과를 해석하는 틀로 미디어학의 '배양 이론(Cultivation Theory)'을 끌어왔다. 조지 거브너(George Gerbner)와 래리 그로스(Larry Gross)는 1976년 논문에서 이 이론을 펼치며 텔레비전을 사람들의 공통된 의식을 길러 내는 새로운 상징 환경으로 보았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접한 사람이 그 이야기 속 세계를 현실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생각이다. 연구자는 캐릭터의 기억이 로봇 설명과 이어지지 않은 결과가 이 이론을 의심하게 할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이 설문이 잰 것은 얼마나 많이 보았는지가 아니라 무엇이 기억에 남았는지라고 짚었다.
그렇다면 이 설문에서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길러 놓았을까. 로봇을 설명하는 내용은 어떤 캐릭터를 기억하든 대체로 일하는 기계로 모여 있었고, 캐릭터에게 쏟은 호감만이 실제 로봇을 믿고 곁에 두려는 마음과 맞닿아 있었다. 필자는 이를 이렇게 읽는다. 영화를 비롯한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길러 놓은 것은 정보가 아니라 호감의 기본값이다. 새 로봇을 만났을 때 별다른 생각 없이 가장 먼저 꺼내 드는 마음이라는 말이다.
호감은 길러졌는데, 로봇을 대하는 법은 어디서 배울까. 영화에는 '서사의 빈자리'가 있다. 로봇을 대하는 법을 알려 주는 이야기가 들어서야 할 자리인데, 비어 있다. 영화는 대개 로봇과의 사건을 보여 주고 로봇과의 하루는 보여 주지 않기 때문이다. 로봇이 구하고, 배신하고, 사랑받는 순간은 극적이다. 그러나 로비에서 마주친 로봇에게 길을 내줄지, 말을 걸어도 되는지는 극적이지 않아서 영화에 담기지 않는다. 이 설문도 같은 자리를 비워 두었다. 로봇을 믿는지, 함께 일할지는 물었지만 일상에서 로봇을 어떻게 대할지는 묻지 않았다.
영화에 로봇을 대하는 법을 가르치는 임무까지 맡길 수는 없다는 반론이 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다만 빈자리는 누군가 채우게 마련이고, 채울 이야기가 없으면 호감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 쉽다. 호감은 로봇 쪽으로 마음을 기울게 하지만, 어디까지 믿고 무엇을 맡길지는 알려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자리는 누가 채울 것인가. 우선 로봇을 들이는 조직이 채울 수 있다. 로봇을 처음 들이는 날 직원들에게 질문 하나를 던져 보자. 로봇을 처음 본 것은 어떤 이야기에서였는가. 직원들이 로봇에게 품은 호감의 출처를 알면 기대가 어디서 왔는지 보인다. 이어서 그 로봇과 직원이 함께 보낼 하루를 장면 몇 개로 써서 나눠 주자. 로봇이 멈췄을 때 직원이 누구에게 알리는지, 길을 막고 서 있을 때 어떻게 하는지, 말을 걸어도 되는지가 장면이 된다. 다음으로 미디어와 교육의 몫이 있다. 로봇이 있는 일터와 가정의 평범한 하루, 곧 사건 없는 하루를 담은 드라마와 교육 영상을 만드는 일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로봇을 어떻게 느낄지를 먼저 가르쳤다. 용감한 로봇에는 박수를, 섬뜩한 로봇에는 비명을 보내는 식이다. 그러나 로봇과 일하는 아침에 필요한 것은 박수도 비명도 아니다. 마음이 먼저 기운 사람에게 모자란 것은 그 아침을 어떻게 보낼지 보여 주는 이야기다.
호감만으로는 행동의 대본이 되지 않는다. 대본은 쓰는 사람이 있어야 생긴다. 로봇을 들이는 사람이 쓰고,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쓰고, 그 이야기를 아이와 함께 보는 어른이 쓴다.
영화는 로봇을 먼저 보여 주었다. 로봇과 보낼 하루의 다음 장면은 로비에서, 일터에서, 거실에서 우리가 쓴다.
최홍규 연구위원(EBS)/ 미디어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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