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들에게 해줄 말이 고작 ‘적게 먹고 운동하세요’뿐이라니. 의사로서 무력감마저 들었습니다.” 미국 콜로라도대 안슈츠 의대(CU Anschutz) 내분비내과 라이 페로(Leigh Perreault) 교수의 회고입니다. 그는 매일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환자에게 처방전을 써주면서도, 정작 모든 만성질환의 뿌리인 비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의사의 조언은 잔소리로 치부되기 일쑤였고, 환자들은 체중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수치스러워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세계적인 의학 저널 <네이처 메디신(Nature Medicine)>에 발표된 패스웨이(PATHWEIGH) 프로젝트 결과는 이 오래된 진료실의 풍경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습니다. 연구진은 의사의 일방적 ‘지시’ 대신 환자의 ‘요청’을 유도하는 시스템을 도입했고, 그 결과 인구 집단 전체의 체중 증가 곡선을 꺾는 데 성공했습니다.
비만 치료에서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미국 콜로라도주 27만4000여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실험에서 확인됐다. (이미지=챗GPT 생성)
‘짧은 안내문’의 힘
‘패스웨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거창한 신약이나 수술이 아니었습니다. 성공의 열쇠는 바로 대기실에 놓인 작은 안내문 하나였습니다.
"체중 관리에 대해 의사와 상담하고 싶다면 데스크에 말씀해주세요."
기존에는 의사가 뜬금없이 살을 빼라고 지적해 환자가 마음의 문을 닫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연구팀은 환자가 스스로 상담을 요청(Request)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자기결정권(Self-determination)’을 치료의 시작점으로 삼은 것입니다. 페로 교수는 “환자가 먼저 도움을 요청하는 순간, 진료실은 비난의 공간이 아닌 ‘안전지대(Safe Space)’로 변했다”고 설명했습니다. 환자가 주도권을 갖게 되자 치료 순응도는 비약적으로 높아졌습니다.
환자의 의지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연구팀은 환자의 요청이 접수되는 즉시 전자의무기록(EHR) 시스템이 자동으로 작동하도록 ‘진료 고속도로’를 깔았습니다. 환자가 대기 중에 작성한 설문 데이터는 의사의 모니터에 즉시 전송됐고, 의사의 진료 노트에는 환자 맞춤형 치료 옵션이 ‘메뉴판’처럼 떴습니다. 의사는 병력을 묻는 데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즉시 약물 처방이나 생활습관 교정 등 ‘해결책’ 제시에 집중할 수 있게 됐습니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이 프로그램의 효과를 검증하기 위해 콜로라도 전역의 일차 진료 클리닉에 도입하는 데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그 결과 콜로라도주 56개 클리닉에서 27만4000여명을 대상으로 18개월간 진행한 이 실험에서, 인구 집단 전체의 체중은 평균 0.58kg 줄었습니다. 매년 인구 평균 체중이 0.5kg씩 증가하는 비만 유행 시대에, 증가세를 멈추고 감소세로 돌아서도록 한 것은 공중보건학적으로 전례 없는 성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개입은 환자가 체중 관련 치료를 받을 가능성을 23% 높였습니다. 대상 환자 중 약 4분의 1이 시험 기간 동안 적어도 한 번 이상 체중 관리 관련 가시적인 치료를 받았습니다. 대부분은 생활습관 개선 조언이었지만, 개입 기간 중 비만 치료제 사용은 두 배로 증가했습니다.
우리나라 의료 현장에서도 고혈압 등 만성질환 관리에 안내문 시스템을 도입하면 환자는 스스로 능동적인 관리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이미지=챗GPT 생성)
한국도 ‘안내문’ 도입 필요
우리나라 의료 현장에도 적용 가능한 이 혁신적인 모델이 비만을 넘어 고혈압 등 만성질환 관리에도 적용된다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추측을 해봅니다. 고혈압도 비만과 마찬가지로 당장의 증상이 없어 환자들이 약물 복용을 소홀히 하기 쉬운 대표적인 질환이라는 점에서 “오늘 의사 선생님과 ‘내 혈압을 낮추는 방법’을 상의하고 싶으신가요?”라는 안내문이 대기실에 붙어 있는 상황을 그려봅니다.
수동적으로 약만 타 가는 관행에서 벗어나, 환자가 “혈압 관리가 필요하다”고 먼저 요청하는 순간 치료의 질은 달라질 것입니다. 환자는 능동적인 관리자가 되고, 의료진은 기계적인 처방을 넘어 환자의 니즈(Needs)에 맞는 심층적인 상담을 제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페로 교수는 “우리는 비만 치료를 위한 ‘고속도로’를 건설했고, 환자들은 기꺼이 그 위를 달렸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1차 의료 현장에도 환자의 ‘자기 결정’을 돕는 새로운 고속도로가 필요해 보입니다. 시스템이 바뀌면 환자도 바뀝니다.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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