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민승 법률전문기자] '의심스러울 땐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원칙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2004년 8월쯤, 강원도 영월군에서는 40대 남성이 흉기에 10여차례 찔려 숨지는 살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끈질긴 수사 끝에 약 20년 만에 A씨가 범인으로 지목돼 재판을 받게 됐습니다. 하지만 2심 법원은 A씨의 범죄 사실이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대법원도 2심 판결을 인정하고, 그대로 확정했습니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모습.(사진=뉴스토마토)
A씨는 자신의 애인이 피해자와 이중의 내연관계를 맺고 피해자를 좋아한다고 말하자, 피해자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피해자의 직장으로 찾아가 흉기를 이용해 피해자를 즉석에서 살해했다는 공소사실로 기소됐습니다. A씨는 △사건 당시 근처 계곡에서 가족들과 물놀이를 하고 있어 현장에 없었던 점 △수사 중 밝혀진 내용을 토대로 보면 제3자의 범행가능성이 있는 점 △A씨의 샌들에서 혈흔이나 유전자가 검출되지 않았고 족적의 감정결과를 믿기 어렵다는 점 등을 이유로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1심 재판부는 족적의 주인이 A씨라는 사실과 그 족적의 주인이 피해자를 살해했다는 사실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됐다고 봤습니다. 사건 현장에서는 다수의 족적과 혈흔이 발견됐는데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관 B씨의 감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족적의 주인이 현장 곳곳을 돌아다녔고 족적이 생성된 이후 그 위에 피해자가 쓰러진 점 △피해자의 비산혈흔이 생성된 후 족적이 생성되기도 했고, 샌들에 혈액이 묻은 상태로 문지방에 있었던 점 △흉기에서 혈액이 낙하된 점 등입니다. 그러면서 족적의 주인이 피해자를 살해한 것이 분명하다고 한 겁니다.
감정관 B씨는 현장에서 발견된 족적과 A씨의 샌들이 동일한 족적형태로 추정된다고 감정했고, 다른 국과수 감정관 C씨도 동일할 가능성이 높다는 취지로 감정했습니다. 대검찰청 감정관 D씨는 사진파일의 화질 개선 작업이 되지 않아 판단불명이라는 결론을 내렸는데, 1심은 감정관 B씨와 C씨가 화질 개선을 한 상태에서 감정했던 점을 이유로 둘의 감정내용을 채택해 A씨가 족적의 주인이라고 판단한 겁니다. 그 외에 현장부재 주장이 거짓으로 보이는 점, A씨의 범행동기 및 증거인멸 정황 등을 이유로 A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나 2심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족적 동일성 등에 관한 감정결과, 현장부재의 가능성 등을 비롯해 유죄를 추단하게 하는 간접증거 및 여러 정황들만으로는 A씨가 피해자를 살해한 것으로 인정하기 충분할 만큼 압도적으로 우월한 증명이 있었다고 보기 부족하다고 판단해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2심은 우선 지문이나 DNA 감정결과 등의 다른 보강자료 없이 족적 감정만으로 A씨를 사건 현장에 있었던 범인으로 특정해 식별하기에는 증명력의 한계가 있다고 봤습니다. 과학적 증거방법이 사실인정에서 상당한 정도의 구속력을 갖기 위해서는, 전제 사실이 진실하고 추론의 방법이 과학적으로 오류의 가능성이 없거나 무시할 정도로 극소하다고 인정돼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5번 진행된 족적 감정결과 중 2번은, 족적이 전체적으로 유사한 측면이 있으나 동일성을 인정할 만한 개별적 특징점은 발견하지 못했다는 의견을 밝혔고, 다른 3번의 감정결과도 각 감정인마다 발견한 개별적 특징점의 개수가 달라 일관되게 동일한 결과가 도출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만약 A씨가 족적을 남겼다고 인정할 수 있더라도 A씨가 피해자를 사건 일시와 장소에서 살해했다는 점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다고도 판단했습니다. 다수의 파편화된 족적이 혼재하는 상황에서 피해자가 살해당한 방향으로 향하는 족적이 일부 존재한다고 해서, 해당 족적의 방향만으로 그 족적 주인의 공격의사 내지 공격행위를 추단하기 어렵고, 피해자와 인접한 거리에서 발견됐다는 사정만으로 피해자를 공격했다고 보기도 어렵다는 겁니다.
특히 △주방에서 제3의 족적이 발견됐고, 사건이 일어난 방에도 문양이 판별되지 않은 족적이 있었던 점 △사건 발생 3일 만에 A씨가 제출한 샌들에서 혈흔반응이 없었던 점 △사건 현장 및 피해자의 의복이나 사체에서 A씨의 머리카락이나 DNA 등이 전혀 확보되지 못한 점 △A씨가 범행 추정 시각에 현장에 있었다는 점이 증명되지 않은 점 △A씨는 샌들을 자발적으로 제출했는데 범행도구 등을 인멸하고 샌들만은 계속해 보관하다가 수사기관에 제출한 점이 범행을 은폐하려는 사람의 행동으로 보기는 석연치 않다고 했습니다. 이런 점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A씨가 피해자를 살해했다는 사실이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다고 봤습니다.
대법원도 2심이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은 채 논리와 경험의 법칙을 위반해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난 잘못이 없음을 이유로 검사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판결을 확정했습니다.
형사소송법 제307조는 증거재판주의를 선언해 형사소송에서 주요 사실의 인정은 반드시 증거능력 있는 증거에 의해 법률에 따른 증거조사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범죄사실의 인정은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로 검사가 엄격한 증명을 해야 합니다.
대법원은 형사재판의 심증형성을 간접증거에 의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형사재판에서 유죄로 인정하기 위한 심증형성의 정도는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여야 하나, 이는 모든 가능한 의심을 배제할 정도에 이를 것까지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검사의 증명이 그만한 확신을 가지게 하는 정도에 이르지 못한 경우에는 설령 피고인의 주장이나 변명이 모순되거나 석연치 않아 유죄의 의심이 가는 등의 사정이 있더라도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봅니다. 피고인은 무죄로 추정된다는 것이 헌법상의 원칙이고, 그 추정의 번복은 직접증거가 존재할 경우에 버금가는 정도가 돼야 한다는 겁니다.
김민승 법률전문기자 lawyerms@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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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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