멧돼지 암컷이 강원 양구 가칠봉에서 새끼를 데리고 먹이를 찾고 있다.
지난달 서울 서대문구 이대 앞을 지나던 중 뜻밖의 교통체증을 겪었습니다. 서울 도심에 멧돼지가 나타나 벌어진 소동 때문이었습니다. 겨울철이면 서울·부산 등 대도시에서 야생 멧돼지가 출몰해 시민들을 놀라게 하고, 때로는 부상 사고로 이어지는 사례도 잦아지고 있습니다. 산에서 먹을 것이 줄어들면서 굶주린 멧돼지들이 음식 냄새를 쫓아 주택가로 내려오는 것이지요.
겨울은 야생동물에게 특히 고달픈 시기입니다. 눈이 내리면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여 먹이를 찾는 일부터 막막해집니다. 후각이 발달한 멧돼지는 주로 야간에 활동해 평소에는 사람 눈에 잘 띄지 않지만, 폭설이 이어지는 날이면 굶주린 멧돼지 무리가 산간 지역에서 목격되기도 합니다.
저 역시 폭설 속에서 멧돼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강원도 양구군과 인제군의 경계에 있는 가칠봉(1242m)에서였습니다. 시야가 좋으면 금강산 비로봉이 보이는 곳이지만, 제가 찾은 날은 폭설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눈 속 야생동물을 볼 수 있다는 기대에 가파른 고지를 올랐고,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능선에 도착했을 때 까마귀 떼의 요란한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철책 경계병들이 버린 음식 찌꺼기를 두고 들고양이와 까마귀가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하얗게 덮인 관목 사이로 검은 형체들이 줄지어 나타났습니다. 어미를 포함한 7마리의 멧돼지 가족이 음식 냄새를 맡고 모여든 것이었습니다. 들고양이와 까마귀는 순식간에 밀려났고, 멧돼지 가족이 남은 먹이를 차지했습니다. 어미 멧돼지는 어린 새끼들이 먹는 동안 주변을 살피며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흔히 멧돼지를 ‘돼지 같다’며 미련하게 묘사하지만, 그 자식 사랑을 보면 어떤 인간보다 낫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멧돼지는 다 자라면 몸길이 110~160cm, 몸무게는 수컷 80~150kg, 암컷 60~100kg에 이르는 대형 포유류입니다. 수컷은 큰 엄니가 곧게 자라고 번식기를 제외하면 홀로 지내며, 암컷은 새끼들과 무리를 이룹니다. 새끼는 갈색 바탕에 세로 줄무늬가 있는 보호색을 지녀 집돼지 새끼와는 쉽게 구별됩니다.
환경부는 국내 멧돼지 개체수를 약 30만마리로 추정합니다. 범·표범·늑대 등 천적이 사라진 한반도에서는 개체수가 꾸준히 증가했고, 인간 생활권과 충돌하는 사례도 따라서 늘고 있습니다.
멧돼지 가족이 파주의 화재로 소실된 페돈사를 찾아 먹이를 찾고 있다.
멧돼지는 봄부터 가을까지 식물의 뿌리·줄기·버섯·지렁이·가재·개구리·새알 등 다양한 먹이를 섭취하는 잡식성입니다. 등산로 근처의 파헤쳐진 땅 대부분은 멧돼지의 먹이활동 흔적입니다. 먹이가 귀한 가을~겨울에는 도토리를 먹고, 부족하면 민가로 내려와 농작물을 훼손하기도 합니다. 산자락 농가에서 큰 골칫거리가 되어 결국 포획·사살이 반복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멧돼지에게 낙인처럼 붙었습니다. 2019년 국내 첫 발생 이후 방역은 장기전으로 이어지고 있고, 2025년 11월 충남 당진의 한 양돈 농가에서 ASF가 확인되며 1423마리가 살처분됐습니다. ASF는 사람에게 전염되지는 않지만 돼지에게는 치사율이 매우 높고, 백신과 치료제가 없는 치명적인 전염병입니다.
문제는 야생 멧돼지를 ‘ASF 바이러스 저장고’로 보는 시각입니다. 유입 경로가 북한으로 지목되며 접경지역에 야생 멧돼지를 막는 울타리가 촘촘히 설치됐습니다. 수년간 방역을 이유로 수만 마리의 멧돼지가 사냥됐고, 이동도 차단됐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백 마리의 산양이 울타리에 희생됐고 생태계 단절에 대한 비판도 커졌습니다. 이러한 문제 제기 속에서 환경부는 2026년부터 단계적으로 울타리 철거를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았습니다.
‘저돌(猪突)’이라는 말처럼 멧돼지는 겉보기에는 무턱대고 돌진하는 동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민첩하고 위협을 느끼면 엄니와 힘으로 자신과 새끼를 지키는 행동을 보입니다. 대부분 사람을 피하지만 새끼가 있을 때는 새끼가 안전한 곳으로 피하기 전까지 위협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숲에서 멧돼지를 만나면 자극하지 말고 멧돼지가 충분히 멀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최선입니다. 큰 소리를 내거나 급하게 움직이면 공격으로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한국의 토종 멧돼지는 정수리에서 등줄기까지 이어지는 긴 갈기털과 윗입술에서 뺨·목으로 이어지는 연한 무늬가 특징입니다. 남부지방에는 집돼지와의 교배종이 많지만, 사람의 손이 거의 닿지 않는 남북 접경지역 멧돼지는 한국 멧돼지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유종이 ASF 방역 정책의 이름 아래 무차별적인 사냥과 이동 제한에 노출되어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죄 없는 멧돼지가 자연 속에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제는 방역의 방향도 더 성숙해지길 바랍니다.
글,사진= 김연수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겸임교수 wildik02@naver.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강영관 산업2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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