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람선에서 하시마(군함도)를 바라보는 관광객들 (사진=연합뉴스)
올해 2025년 을사년은 을사늑약이 나온 지 120년 되는 해입니다. 광복 80주년이자, 국교를 정상화한 한·일 협정 60주년(6월 22일)이기도 합니다.
지난해 한·일 정부는 협정 6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행사를 기획했습니다. 3월에 대통령실은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계기로 새로운 공동 문서 발표를 검토하겠다고 했고, 7월에 미국 워싱턴D.C.에서 만난 당시 대통령 윤석열씨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내년 국교정상화 60주년을 의미 있게 맞이하기 위해 한·일 양국이 지혜를 모아 외교당국 간 준비에 착수하겠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9월에는 미즈시마 고이치 주한 일본대사가 "외교부와 일본 외무성에 관련 사무국이 설치됐다"고 공개하면서 "김대중·오부치 선언 2.0을, 한국과 함께 검토하겠다"고 했습니다.
윤석열·기시다 구상 현실화 됐다면…일본 과거사 '면죄부 선언'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2.0 시대 실현'은 윤석열의 대선 외교안보 공약입니다. 만약 이대로 진행돼서 '신한일공동선언' 또는 '김대중·오부치 선언Ⅱ'가 나왔다면, '전범국가 일본'의 과거를 묻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는 면죄부 문서가 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윤석열정부 집권 2년 반 동안 중국과 북한에 맞서는 한·미·일 협력 절대강화라는 미명 아래 '중일마'(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라는 기조로 일본에 아낌없이 주는 외교를 해왔기 때문입니다.
과거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의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외교문서로 처음 적시한, 역사적인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고갱이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는 겁니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일본이 이시바 정권으로 교체되고 한국도 윤석열정부 퇴진이 확실시되고 있습니다. 애초 구상대로 한·일 협정 60주년 행사를 할 수 있을지 불투명해진 겁니다. 지난달 13일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방한한 이와야 다케시 일본 외무상과 만난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이해 관계 개선을 발전시키기로 합의했으나, 구체적인 계획을 내지 못했습니다.
한·일 관계가 양국 모두에게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고, 한·일 협정 60주년도 어떤 형식, 어떤 내용으로든 협력강화의 계기로 삼아야 할 기념일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군함도 후속조치 보고서에도 '강제동원' 명시 안 해
그런데 일본은 성의가 없어도 너무 없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이하 위원회)는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일본이 제출한 하시마(군함도) 탄광 등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관련 후속조치 보고서를 홈페이지에 공개했는데요. 여기서도 위원회 등이 요구한 조선인 강제동원 명시를 반영하지 않은 겁니다.
일본은 2015년에 하시마 탄광 등 조선인 강제노역 시설 7곳을 포함한 메이지 시대 산업유산 23곳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반발하면서 논란이 일자 당시 조선인들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against ther will) 동원돼 △가혹한 조건(undernarsh condition)에서 △강제로 노역(forced to work)했다면서, 방문객 등에게 이를 알리는 인포메이션 센터를 설치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에 한국이 동의하면서 만장일치로 하시마 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으나, 일본은 약속을 어겼습니다. 산업유산정보센터는 5년이 지나서야 만들었는데, 그나마도 하시마 현장이 아닌 도쿄 신주쿠였고, 오히려 군함도가 살기 좋은 곳이었다고 했습니다.
한국은 물론 위원회가 등재 당시 약속한 조치를 이행하라고 거듭 요구했지만 이를 계속 무시해 왔습니다. 적반하장으로 2023년 9월에는 한·일 강제병합이 합법이었다며 강제동원을 부인하는 자료까지 설치했습니다. 이를 철거하라는 한국 정부 요청도 거부했고, 끝내 이번 보고서도 강제동원 사실을 전면 외면해 버렸습니다.
외교부는 "세계유산위원회의 거듭된 결정과 일본 스스로 약속한 후속 조치들이 충실히 이행되지 않고 있는 데 대해 다시 한번 유감을 표한다"고 대변인 논평을 냈습니다. 지금 일본이 여기에 콧방귀나 뀔까요?
지난해 11월 24일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 아이카와개발종합센터에서 한국 측이 불참한 가운데 '사도광산 추도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일본은 조선인 1500여 명이 강제노동을 한 니가타현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때도 이 같은 먹튀를 똑같이 반복했습니다. 심지어는 지난해 11월 사도광산 추도식도 세계유산 등재를 축하하는 '자화자찬' 무대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도치기현에 있던 구리 광산 아시오광산과 도야마현 구로베강의 수력발전 전용 구로베댐을 다음 세계문화유산 등재 후보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제안서에 조선인 수천명을 강제동원한 역사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내란 사태'에도 한국…일 '과거사 왜곡' 또렷이 기억
한국이 아무리 내란 사태로 경황이 없다 해도, 윤석열정부 동안 일본이 보인 행태를 한국민은 또렷이 기억할 겁니다.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기념해 15일 오후 6시부터 30분간 서울과 도쿄의 상징적 랜드마크인 N서울타워와 도쿄타워가 함께 불을 밝히기로 했습니다. 양국 수도의 대표적인 건축물을 빛내 60주년을 기념하자는 일본 측 제안을 우리 정부가 수용했습니다.
충분히 함께 할 만한 행사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벤트는 실내용까지 충족돼야 양 국민이 진심으로 환영하고 기뻐하는 축제가 됩니다. 과거사 문제에 대해 한국민들을 의식하지 않는 일본의 행태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양국은 의미를 채운 한·일 협정 60주년 행사를 함께할 수 있을까요? 미래를 기약할 만한 계기로 말입니다. 일본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언론 왕국이니 윤석열정부의 대일정책이 한국에서 외면받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더욱이 6월 22일은 윤석열정부가 완전히 물러난 상황일 텐데 말입니다.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hb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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