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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이젠 진보도 늙었다
2024-03-05 06:00:00 2024-03-05 06:00:00
2002년 대선 당시를 회고해 보자. 노무현 후보를 둘러싼 30대들은 인터넷과 휴대폰으로 무장한 젊고 활력이 넘치던 세대였다. 이들이 인터넷 공론장을 지배하는 동안 50대 이상의 기성세대들은 기사에 댓글을 다는 방법조차 몰랐다. 아니, 알 필요조차 없었다. 그러는 동안 30대들은 자신들의 독특하고 튀는 감성으로 빠르게 사이버 공간을 접수하며 민주당마저 흔들어 댔다. 정권이 바뀌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인터넷의 위력에 공포에 질린 이명박 정부가 얼마나 위기감이 컸는지는 국정 곳곳에서 드러났다. 집권 초 미국발 금융위기로 어려움을 겪던 이명박 정부는 비상경제상황실을 운용하면서 그 첫 작품으로 인터넷에서 명성을 떨치던 익명의 경제 평론가 미네르바를 구속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패배한 이명박 정부는 청와대에 국정소통비서실을 설치하여 포털의 간부를 비서관으로 영입했다. 이후 전 정부 부처에 페이스북 사용을 교육시켰고 장·차관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SNS 활용 능력을 도입했다. 정부 기관이 직접 나서서 보수 인터넷 언론을 육성하였고, 국정원과 사이버사령부는 아예 댓글 부대로 변신하기에 이른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인터넷 공간에서 보수와 진보는 거의 균형을 맞춘다. 문화적으로 보수는 진보를 추격했다.
 
노무현이 등장하던 때의 30대는 이제 50대를 훌쩍 넘겨 60대에 도달하고 있다. 노안(老眼)으로 휴대폰을 오래 들여다보기조차 어려운 시기다. 얼마 전 동대문에서 팬이라며 접근해오는 한 장년의 남자는 필자에게 “눈에 무리가 가서 유튜브를 많이 보지 못한다”고 사정을 털어놓는다. 바로 그 남자가 22년 전에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주역 아니었던가. 이 장년의 진보층은 작년 아시안 게임 탁구 시상식에서 동메달을 딴 장우진-전지희 조와 임종훈-신유빈 조가 시상식에서 보여 준 달달한 장면에 아무 느낌이 없다. 방송사 유튜브 조회수를 합하면 이 시상식 장면은 2천만이 넘고, 중국 웨이보에서 댓글이 1억 개 넘게 달렸다. 그런데도 내가 아는 꼰대 진보들은 이 영상을 보여주어도 아무런 감흥이나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노무현 돌풍이 일어나던 당시의 50~60대 모습이다. 과거 진보의 인터넷 체력이 약화된 지금, 가상 공간은 보수도 진보도 아닌 무당파가 30%가 넘는 청년 세대가 서서히 주류로 부상하고 있다. 이들은 MBTI로 사람을 분류하고 인공지능도 제법 다룰 줄 안다. 이 신세대는 욕망의 세대다. 시대 정신이나 공동체의 과제에는 무감각하지만 자산 형성과 소득에 민감하고, 재미를 아는 선량한 이기주의자들이다. 이들이 구체적인 욕망을 말할 때 구진보는 추상적인 도덕을 말한다. 두 세대 사이에는 거대한 인식의 간극이 있다. 얼마 전에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가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와 헤어지면서 “상당한 세대 차이를 느꼈다”고 한 것도 바로 그런 인식의 간극에 대한 체험담으로 여겨진다.
 
공천 파동으로 심한 후유증을 앓는 지금의 민주당을 보면 늙은 진보의 얼굴이 보인다. 한때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우던 활력이 넘치던 진보의 에너지는 온데 간데 없고 특정 정파와 개인의 이익에 집착하는 과거 보수의 행태와 닮은 모습이다. 공천 결과에 반발하며 서슴없이 당을 바꾸는 일부 의원들의 행태는 시대 상황에 맞게 진보하지 못한 구린 민낯이다. 이 늙은 나무에 다시 꽃이 피려면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가지를 쳐내야 한다. 그래야 몸은 늙었으되 마음은 늙지 않는 위대한 정신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김종대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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