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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뚝심과 고집 사이
2023-12-08 06:00:00 2023-12-08 06:00:00
정부에서 전력계통 혁신대책을 발표했다. 혁신이라는 말을 붙일 만큼 과감한 내용들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대규모 HVDC 건설을 추진한다는 내용이 눈에 띈다. 정부는 동해안에 신규 대형 원전을 15년내에 다수 건설하기를 희망하지만, 전기가 앞으로 많이 필요한 곳은 수도권이다. 발전소에서 전기를 만들어도 수요처까지 보내야만 쓸모가 있지만, 동해안에서 수도권을 연결하는 초고압 송전망 건설은 백두대간을 넘어야 하니 여러모로 어려운 일이다. 전남 서남해안에 대규모 해상풍력과 태양광 발전소가 건설되고 있는데, 이 역시 수도권까지 보내야만 되지만, 초고압 송전망을 평야와 도시를 가로질러 건설하는 것은 수많은 이해관계자의 조율이 필요한 난제이다. 송전선을 건설하는 데 13년이 걸리고 있어 발전소를 다 만들어도 무용지물이 되는 일도 생기니 어떻게든 빨리 송전선 건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전기가 없어 큰일이 발생할 지경이다.
 
이번 혁신대책에서는 송전선 건설 문제 해결을 위해 기술적으로 HVDC를 내세우고 있다. 동해안과 수도권을 연결하는 동서축, 전남과 수도권을 연결하는 남북축의 소위 전기 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는 내용이다. HVDC는 고압직류송전 기술을 의미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전기는 220V 교류이며, 송배전에서는 훨씬 높은 전압의 교류를 보통 이용한다. 전기 고속도로라고 부를만한 초고압 송전선은 765kv를 이용하는데, 송전탑이 40층 아파트 높이로 거대하다. HVDC 기술을 적용하면 765kv 초고압 송전탑보다 훨씬 작은 송전탑으로도 비슷한 용량의 전력을 수송할 수 있고 송전효율도 높은 편이다. 또한 송전탑의 숫자도 줄일 수 있어 해저 송전망에는 필수적으로 HVDC를 적용하고 있다.
 
HVDC 기술은 상기의 여러 장점으로 인해 꽤 오래전에 외국에서 개발되었고 1954년 스웨덴에서 최초 적용되었다. 브라질에는 세계에서 가장 긴 2500km HVDC 선로가 운영 중이며, 중국에서는 765kv보다 더 고압인 800kv HVDC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 200여곳에서 사용되고 있으니 실적도 적지 않다. 국내도 제주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1,2번 제주 연계 선로를 해저 케이블로, 경기 남부권인 북당진-고덕 구간에 단거리 HVDC 한 곳이 구축되어 운영 중이다. 3번 제주 연계 선로와 강원-수도권 장거리 HVDC는 현재 건설 중이다. 제주 연계 선로는 용량이 각각 150MW(1번), 250MW(2,3번)으로 용량이 작다. 북당진-고덕 구간은 3GW로 대용량이나 구간 길이는 34km로 짧은 편이다.
 
HVDC 기술은 사용하는 전력변화 소자에 따라 전류형과 전압형으로 구분된다. 싸이리스터라는 소자를 쓰는 전류형 HVDC는 실적이 많고 검증된 기술이나 근본적인 한계가 있어 IGBT 소자를 사용하는 전압형으로 넘어가는 추세이다. 한전은 25년 전에 국내에 HVDC를 도입할 때 실적이 많은 전류형 HVDC를 선택하면서, 이후 HVDC 기술의 국산화를 시도했다. 3기의 HVDC를 일부 해외 기술로 건설하면서 2014년부터 차세대 전압형 HVDC 기술 개발을 본격화했고, 현재 건설 중인 HVDC는 자체 개발한 전압형 HVDC 기술을 채택했다. 미래의 전기 고속도로가 될 전남-수도권, 강원-수도권 대용량 HVDC는 모두 자체 개발한 전압형 HVDC를 적용한다고 한다. 즉 대용량-장거리-전압형 HVDC를 적용한다는 것이다.
 
HVDC를 도입하면서 한전은 해외 메이커가 핵심 기술과 장비를, 국내 전력장비 회사들이 일부 장비를 개발해서 공급하는 방식을 취했다. 외국 메이커의 최신 기술과 국내 메이커가 개발한 장비의 조합이라 한 번 문제가 생기면 그 영향이 실시간으로 전파되는 전력망 특성상 다소 위험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전류형 HVDC는 교류 송전망에 중간에 직류 송전을 해야 하므로 교류-직류 변환 변전소가 양끝단에 위치하는데 싸이리스터라는 소자를 대규모로 이용한다. 이 소자에서 막대한 고조파 노이즈가 발생한다. 고조파 노이즈는 전력망을 돌아다니면서 각종 기기에 악영향을 끼친다.
 
최근 경기 남부 지역의 순간 정전도 고덕 HVDC 변전소에서 발생한 사고 때문임이 밝혀졌다. 고덕 HVDC 변전소는 준공된 지 2년이 넘었으나 여전히 시운전을 반복하고 있고, 설계 용량의 절반도 쓰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보수를 하고 수리를 하며 계속 노력하고 있지만 고장이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반복된다는 점이다. 다음 사고가 언제 또 터질지 모르는 게 가장 위험하다. 수도권에는 안정된 전기 품질을 요구하는 민감한 공장들이 밀집되어 있다. 반도체 제조 공장이다. 3나노의 초미세 공정으로 웨이퍼를 생산하고 있는데 계통을 통해 고조파 쇼크가 오면 아무리 공장과 설비 앞단에 전압/주파수 안정장치와 고조파 필터를 달아도 영향을 받게 된다. 웨이퍼의 수율이 5%만 떨어져도 수백억원의 손실이 순식간에 발생할 수 있다. 
 
앞으로 동해안과 호남에서 장거리-전압형-대용량 HVDC를 통해 10GW의 이상의 전력이 수도권으로 공급될 예정이다. 변환 변전소 문제로 이 전력이 갑자기 차단되며, 수도권에 정전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도 크다. 정전이 5분만 발생해도 큰 혼란이 우려된다. 엘리베이터가 서고, 가게들의 POS 장비가 나가고, 영화관의 영화가 꺼지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전기는 보수적이고 신중하게 이중삼중으로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만약 수도권 일대의 정전 즉 광역 정전이 실제 발생하면 완전복구까지 두 시간 이상 소요될 가능성이 크다.
 
최첨단 기술을 실현하고 국산화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어려움은 항상 있어 왔다. 뚝심으로 버텨서 국산화를 완성하고 그걸 기반으로 해외 수출을 해서 여러 기업이 성공한 사례도 많다. 하지만, HVDC는 전력망과 관련되어 있어 한 번 문제가 터지면 불특정 다수가 막대한 피해를 볼 수 있다. 또한 기존 시설의 문제가 반복되고 있으며 운영 실적도 부족한데, 국가 송전망의 미래를 장거리-전압형-대용량 HVDC에 거는 것은 너무 위험이 크다. 뚝심과 고집을 구별해서 신중하게 판단하고, 리스크를 충분히 감안하는 접근이 아쉽다.
 
권효재 COR 페북그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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