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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익도의 밴드유랑)윤지영이 그린 삶의 순환 '음의 정원'
2023-05-25 17:41:37 2023-05-25 17:41:37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내면으로 깊숙이 침잠(沈潛) 해 본 누군가의 세계는 고독하고도 짙은 법.
 
"해리포터 끝까지 보셨어요? 해리가 잠시 죽는단 말이죠. 그리고는 사후세계 같은 곳에 떨어져요. 모든 것이 새 하얗고 끝도 없는. 그런 곳에서 인터뷰를 하면 어땠을까 해요."
 
최근 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 사옥에서 만난 싱어송라이터 윤지영(27)의 언어는 음악만큼이나 짙었습니다. 상상의 '하얀 공간'이 수평선처럼 넘실댔습니다. 그런데,  왜 하얀색이냐고. "현실 세계가 아니어도, 속에 있는 것들을 털어놓기 좋을 것 같아서요."
 
첫 정규음반 '나의 정원에서'는 응달을 응시하다, 이제 막 새로운 빛으로 발걸음을 옮긴 윤지영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EP 'Blue bird'에서 앨범 전체를 파랗게 칠하고 미숙의 인정, 자유에 대해 얘기했다면, 이번 음반의 줄기는 주황빛처럼 은은하게 번지는 작은 희망과 성숙이라고.
 
"대희망이었다면 환한 조명이었을 거 같은데, 그렇게 밝지는 않은. 그치만 어둡지도 않은, 노을 같은 세계일 것 같아요."
 
실제로 이번 앨범 작업 기간 병원에서 조직검사와 수술 등 여러 힘든 과정들을 겪었습니다. "이제 마음도 몸도 건강해졌다"며 환하게 웃습니다. 
 
싱어송라이터 윤지영. 사진=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
 
"유독 말도 안되게, 제 나이에 있을 법하지 않은 게 있었어서 잠깐 휘청였는데, 정신 단단히 챙겨야겠다고 다짐했어요. 'Blue bird' 때 얘기했던 것처럼 '나는 원래 미숙해'라고 하면, 자유롭긴 한데 절대 건강하고 단단해지지는 못하겠더라고요. 능숙한,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어른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첫 번째 트랙 '어제는 당신 꿈을 꿨어요'는 누군가의 죽음에 관한 곡. "'내가 건강해지고 성숙해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힘들어하던 과거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하다가, 그 과거가 '혹시 누군가의 죽음이었다면?' 생각해본 것이죠. 묘하게 제 음악에는 죽음과 관련된 곡들이 있을 수 있는데요, 그게 대체로 '당신'과 연결이 돼요."
 
후렴 직전의 리버브(다수의 반사음 효과) 효과가 뒤엉키는 부분이 휘몰아치는 감정을 표현했다면, 이어지는 '난 나아가야 하겠죠'라는 건조한 어투는 현실로 돌아오는 자각 현상이자, 삶의 방향성에 관한 단초들. 음반은 곡 순서에 따라 생각과 감정의 상승·하강 곡선을 연신 그리며 흘러갑니다.
 
휘파람과 귀여운 리듬들이 사탕처럼 튀어대는 'You Have To Trust Me!'가 이제 건강하게 나아가겠다는 삶의 건강한 피력이라면, 마이너틱한 팝록 기타 사운드가 돋보이는 'City Seoul'은 잔뜩 싸준 엄마의 김치를 골칫덩어리라 생각하던 어느 시절을 떠올리다 "등 뒤로 내가 두고 오는 것들에 대한 불안함, 다시 뒤돌아 갈 수 없을 거라는 죄책감"에 대해 생각해보는 식.
 
다소 낮고 잔잔하게 날아가는 곡 '비행기'는 미국 얼터너티브 록 밴드 윌코 같은 곡을 구상하다 트로트의 잔재가 남은 곡. '조금은 웃음이 나더라고'라고 끝나는 가사에 앨범의 주제인 '작은 희망이 보인다는 느낌'을 담았다고 합니다. "죽으면 하늘나라 간다고 하잖아요, 하늘나라? 비행기 타면 보이나 했던 것이죠." 
 
싱어송라이터 윤지영. 사진=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
 
이 음의 곡선들을 타면서 생각했습니다. 앨범 제목 '나의 정원에서'란, 결국 당당해졌다가도 다시 수그러들고, 그러다가도 다시 일어서는 삶의 순환 과정, 그 초록과 같은 은유가 아니었을까.
 
"저처럼 나아가고 싶고 나아가는 과정에서 당당해졌다가, 다시 흔들렸다가, 근데도 모르겠어, 그래도 나아가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이 과정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쉼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그런 앨범 제목을 정한 것 같아요."
 
미숙과 성숙의 수평선이 있다고 하고, 삶이 성숙으로 향하는 달리기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 음반이 될 것입니다.
 
'날 괴롭힌 건 뭐였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나는 모든 사람을 이해할 수 잇겠지', '언젠가는 성숙한 사람이 돼 있겠지' 흐름으로 이어가고, 그 과정에서 '작은 희망'을 찾아가고 싶었다고. 
 
"어쨋든 이 앨범의 끝은, 그래서 미성숙함을 벗어나서 어른이 됐답니다가 아니라, 그러고 싶었대요, 그럴거에요입니다. 나은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만 먹어도 달라진다, 그렇게 마음 먹은 것 자체가 작은 희망이에요라는 조금의 밝은 느낌이었어요.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한 길이 얼마나 길지 모르겠지만, 그 마음을 먹은 것만으로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다 거기서 희망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윤지영은 이번 앨범을 두고 다시 하얀 방을 연상합니다. 
 
"어디가 될진 모르겠지만, 아무도 없어야 할 거 같고요. 오로지, 나와 스스로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보면 이 앨범 뿐 아니라 저는 음악을 만들고 나면 자아실현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듣는 분들한테도 그런 경험이었으면 좋겠어요. 홍대 길 걷다가 들어주셔도 좋겠지만,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공간에서, 스스로를 들여다보게 하는 곳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싱어송라이터 윤지영. 사진=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
 
에필로그. 윤지영의 음악 정원을 걷다
 
-이번 음반은 얼마기간 동안 어디서, 어떻게 작업이 이뤄졌을까요.
 2020년 후반부터 2021-2022년까지 곡을 썼고요. 첫 단독공연을 하기 전에 정규 음반을 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어서 그 전까지 썼던 곡을 모으고 필요한 곡들을 새로 썼어요. 작년 여름이 돼서야 본격적인 음반 작업을 시작했어요. 프로듀서로 (김)춘추(실리카겔 기타·보컬)가 오고, 편곡을 6개월 정도 함께 했어요. 올해 1월부터 녹음을 시작했고요. 곡은 대체로 제 집에서 썼고, 편곡은 온라인으로 주고받다가, 나중에는 춘추 작업실에 갔는데, 반나절은 꼭 거기 있었던 것 같아요.
 
-첫 번째 트랙 '어제는 당신 꿈을 꿨어요'가 앨범의 주제이자 시작 같은 질문이었다고 봤습니다. '당신은 이제 떠난 사람이고 더는 그리워하지 않고 나아가겠다는 말', 그 당신은 자신을 향한 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그게 저로 들릴 수 있다는 게 신선한데요. 디테일하게 이거는 이런 거고 누구에요라고 콕 짚진 않았어요. 공연에서 곡 소개를 해도 애매모호하게 한달까, 다르게 생각하면 다양한 방법대로 해석되면 그게 좋은 거니까. 여기서 당신은 사실 누군가의 죽음인데요. 딱 이정도만 말하는 게 감정에 도움된다고 생각해서요. 청자들의 해석에 방해되지 않는 기준인 거 같아요.
 
-곡 작업 프로세싱은 어떻게 이뤄지는 편인지.
지겨울 정도로 안 변하는 것 같은데요. 앉은 자리에서 코드와 가사 멜로디가 동시에 나와야 해요. 혼자서 뭔가 엄청 뾰족한 모서리를 만들듯이 집중을 하면 하고 싶은 말이 한 마디가 생각나요. 그걸 또 뱉지 않고 피아노에 다가 집중을 하면 그 '3요소'가 딱 맞춰질 때가 와요. 코드를 먼저 쓰거나 가사를 먼저 쓰면 딴 길로 새는 것 같아서, 제겐 비효율적인 것 같아요. 코드-가사-멜로디가 나오면 컴퓨터를 켜서 가편곡을 해요. 벌스까지 멜로디가 잡혔다면, 컴퓨터로 가편곡 상태로 만들어야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고, 곡 형태가 거기서 정해지고요. 
 
-김춘추씨는 정작 "본인은 거들었을 뿐"이라고 하시던데요. 앨범에서는 서로 어떻게 도움을 줬나요.
악기의 위치가 기타보다 드럼이 앞이고, 그런 걸 누가 하냐에 따라 질감이 달라지는 거 같아요. 곡의 규모를 결정하고, 또 어느 정도로 부드럽게 하거나 건조하게 소리를 담을지, 방의 크기가 어땠으면 좋겠다 식의 녹음과 믹싱에 대해 많이 이야기를 나눴어요. 곡들이 통일성이 있게끔 질감이 구현된 것 같아서 만족해요. 
 
싱어송라이터 윤지영. 사진=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
 
-좋은 가사는 '배배 꼬지 않고 공감가기 쉬운 노랫말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신 인터뷰를 봤습니다. 가사를 쓸 때 본인에게 영감을 주는 것은 무엇이고, 이를 어떻게 표현하려고 하는지요.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가사를 처음 뱉을 때는 무의식의 상태로 시작한단 말이죠, 한 파트나 한 구절이 나왔을 떄 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올 때가 있어요. 말로 표현하긴 힘든데, (집중하는 눈빛으로) 마음속에서 뾰족한 걸 만들면 그게 가사가 됩니다. 그러고 나선 물론 조금 고쳐요, 벌스만 써놓고 뒷파트는 글로 쭉쭉 정리하는 식이죠.
 
-개인적으로는 이번 음반에서 특이한 사운드의 포인트이자, 전작과 연결되는 윤지영의 사운드라 하면, '날 지키던 건'의 신디 사이저, 그 빛바랜 노스탤지어를 연상시키는 것 같은 소리들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정작 본인은 자신만의 사운드 색감이라고 해야하나, 그런 걸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가 궁금합니다.
 
나한테 어떤 시그니처 사운드가 있었으면 좋겠다거나, 내 음악에 잘 맞는 통일된 사운드가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는데, 저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이 제가 선호하는 걸 고르다보니까, 저의 취향에 가까운 소리였을 것 같아요. 음식의 간을 하듯이, 먹어본 음식을 기억하면서 '이건 아닌데'라는 판단을 하잖아요. 여태 들으면서 생긴 나의 취향과 내 머릿속에 있는 좋아하는 소리에 가깝게 간을 치다보니까 가까워지는 방식인 거 같아요.
 
-검정치마, 오아시스, '더 나인틴 세븐티파이브(The 1975)' 같은 음악을 즐겨 듣는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생각해보면 윤지영씨가 솔로작들을 구상할 때 그런 영향들이 자연스레 나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최근 듣는 음악은 뭔가요.
 
요즘은 클래식 연주를 많이 들어요. 리스트 '사랑의 꿈'도 좋아하고. 얼마 전에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교향곡 2번은 거의 울면서 들었어요. 곡의 설명을 듣고 나서 눈물이 났던 건지, 음악 때문인진 모르겠는데요. 라흐마니노프는 그 곡을 내기 바로 전 작품이 '대폭망'을 했대요 큰 슬럼프 빠지고 정신적 문제에 시달리다가 정신치료까지 받았다고 해요. 건강해지려는 마음으로 살자고 작업을 해서 슬럼프를 이겨낸 곡이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초반부부터 피아노 코드를 쾅하고 치는 건데 엄청엄청 슬프게 들려요, 나의 쌓이고 쌓인 슬럼프와 자기의 문제를 피아노 한번에 쏟아내고, 갑자기 격정적으로 밝아지더니, 격정의 순간이 지나면서 행복과 평화가 쏟아내면서 슬럼프를 이겨내죠. 
 
-그건 지영씨의 지금 음반과도 닮았네요.
저도 생각도 못했는데, 지금 얘기하면서 알았어요. 흐하.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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