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1일은 동학농민혁명기념일입니다. 오늘 Pick에서는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지만 오늘날 평등사상과 자유민주화의 지평을 연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올해로 129주년을 맞이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란
조선 고종 31년인 1894년 동학 지도자들과 동학교도,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백성의 무장 봉기로 낡은 봉건제도를 개혁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만민평등세상을 추구했던 반봉건 민주항쟁이자 국권 수호를 위해 일제 침략에 맞섰던 농민 중심의 민중항쟁입니다. 동학 지도자 전봉준이 탐관오리 조병갑을 처단하자며 봉기를 일으켰고, 부패한 관리들 모두 처벌하자는 목소리에 많은 농민이 공감해 대규모 농민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반봉건·반외세 운동으로 크게 1894년 4월의 전주성 봉기(1차), 9월의 전주·광주 궐기(2차)로 나뉘는데 1차 봉기는 봉건체제개혁, 2차 봉기는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항일무장투쟁이었습니다. 또 농민들이 궐기하여 부정과 외세에 항거했다고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불리웁니다.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긴 했으나 내부적으로는 갑오개혁, 외부적으로는 청·일전쟁의 시발점이 되었고 그리고 이후 1919년 3·1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봉준은 조선말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어려서부터 몸집이 작아서 녹두라고 불려서 녹두장군이란 칭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일어난 최대 규모의 민중항쟁이었다. 1년여의 기간에 연인원 30만 명의 농민 대중이 참여했고, 최소한 3만 명 이상이 희생됐습니다.
동학농민혁명 배경
1882년 사회의 혼란과 정부의 부패가 심해져 민심이 동요하던 시기였는데요, 이후 구식 군인들의 반란이었던 임오군란과 개화 정권을 수립하려했던 무력 벙변인 '갑신정변'이 연달아 일어나던 시기였습니다. 여기에 1892년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이 온갖 각종 횡포를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전라도는 물산이 풍부한 곡창지대로 국가재정도 이 지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전시대에 걸쳐 수탈의 대상이 되어 농민들은 항상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지쳐있었죠. 조병갑은 특히나 악랄한 군수였고 백성들의 증오와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민란의 직접적인 불씨가 된 것은 만석보(萬石洑)의 개수문제에 따르는 수세징수사건에서 시작됐습니다. 결국 견디지 못한 군민들이 전창혁을 대표로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결국, 전장혁이 곤장을 맞고 죽을음 맞이하자 그의 아들 전봉준이 봉기를 계획하게 됩니다. 광범한 농민층의 분노가 폭발해 민란이 일어난 셈이죠. 이에 동학교도들은 1894년 1월 전봉준을 중심으로 전라도·충청도 일대 농민들을 모아 고부 관아를 습격해 '고부민란'을 일으켰습니다. 관아를 점령한 전봉준은 정부에 조병갑의 횡포를 시정할 것과 외국 상인의 침투를 금지하라는 등의 요구사항을 제시했으며, 정부로부터 폐정을 시정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10여 일 만에 해산했습니다. 그러나 고부민란을 조사하러 온 안핵사 이용태는 오히려 민란 관련자들을 역적죄로 몰아 혹독하게 탄압했습니다. 그러자 '인내천' 곧 사람이 하늘이다.'라며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하던 동학접주 전봉준은 '사발통문'을 돌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라며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가 되어 농민들과 함께 봉기하니 이것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었습니다.
사발통문(沙鉢通文)?이란?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돋보이는 '사건'의 하나는 사발통문입니다. 사발통문'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고부성을 점령하고 조병갑을 목 베어 죽일 것 △군기고와 화약고를 점령할 것 △군수에게 아부하여 백성을 침탈한 탐리를 엄하게 징벌할 것 △전주 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나아갈 것. 이들은 봉기를 준비하면서 주동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사발 모양으로 둥글게 이름을 적은 문서를 만들었습니다. 그냥 기록해 두는 문서가 아니라 비밀리에 돌려보기 위해 마련한 것으로 사발을 종이에 엎어둔 후 사발 둘레를 따라 한 사람씩 세로 쓰기로 둥글게 이름을 적었기 때문에 누가 시작점인지, 주도자인지 알기 어려웠죠. 통문이란 어떤 일이 있을 때 사람을 모으거나 어떤 일을 알리기 위해 돌리는 격문이나 호소문을 말하며 조선 후기에 많이 이용됐으며 특히 19세기 후반 농민항쟁이 거세지면서 관에 항의하고자 각 마을마다 통문을 돌려 사람을 모았으며, 서원과 향교에서도 사람을 불러모을 때 이를 돌렸습니다. 이 사발통문은 1968년 전라북도 정읍군 고부의 송준섭의 집에서 발견되었습니다.
1차 봉기(반봉건운동)
-전봉준은 김기범, 손화중, 최경선 등의 동학접주들과 전라도 고창군 무장현에 모여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에 있음을 천명하는 창의문을 발표합니다. '무장동학포고문'으로도 불리는 창의문에서 과감히 봉기할 것을 요청하자 10일여만에 1만여명이 동원됩니다, 동학교도와 농민과의 결합은 이때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1894년 3월 21일 최시형의 탄생일을 기해 궐기하게 됩니다. 이 사태를 접한 정부는 군대를 파견했지만 농민군은 황토재 승리에 이어 정읍, 흥덕, 고창, 영광, 함평, 장성, 나주, 장성, 태인, 부안 등에서 관군을 무찌른 것은 물론 삼남지방을 휩쓸면서 전주성을 점령했습니다. 하지만 전주성 점령 이후 관군과 농민군의 접전으로 양측은 큰 타격을 입게됩니다. 이즈음 조선 정부는 청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이에 그해 5월 5일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에 상륙하게 됩니다. 이에 나라 안팎의 위급상황을 인지한 전봉준은 5월 8일 관군과 폐정개혁을 실시한다는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게 돼죠. 화약을 맺은 관군은 몇몇 부대를 전주에 남기고 철군했고 동학농민군도 철군 및 해산합니다. 그러나 군현의 행정이 혼란과 마비상태에 이르자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은 상의 끝에 호남지방의 각 군현에 농민자치기구인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12개 폐정개혁안을 내걸고 민정(民政)을 실시했습니다.
-‘폐정개혁안 12조’: 아주 잠깐이지만 동학 농민들은 모든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 즉 '대동 세상'을 살아보게 됩니다. '집강소'라는 농민 자치기구를 설치해 농민들 스스로가 치안과 행정을 유지했고 '폐정개혁안 12조'를 통해 개혁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1. 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정부의 정책에 협력한다. 2. 탐관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해 엄격히 징벌한다. 3. 횡포한 부호를 엄격히 징벌한다.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5. 노비 문서를 소각한다. 6. 7종의 천인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갓은 없앤다. 7. 청상과부의 재혼을 허용한다. 8.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9. 관리 채용에는 문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0. 왜와 통하는 자는 엄벌한다. 11. 공, 사채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은 모두 무효로 한다. 12.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한다
제2차 봉기(항일무장투쟁)
모두가 어울려져 함께 평등한 세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전봉준과 동학 농민들의 봉기를 핑계로 조선에 입성한 일본은 경복궁을 침범해 고종을 핍박했고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친일 내각을 구성하고 갑오개혁을 진행하는 등 심각한 내정 간섭을 서슴지 않습니다. 전봉준과 동학 농민군은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또다시 봉기를 일으키게 됩니다. 이러한 일본의 행태를 전해들은 전봉준은 일본군 척결을 위해 제2차 기병을 준비, 9월 18일 삼례에서 집결해 서울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반일감정이 쌓여 있던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등 전국적 항일운동으로 확산됐고 민중봉기가 확산되자 정부는 군을 출병시키고 일본에 출병을 요청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했습니다. 모여든 농민들이 서면 온 산이 농민들의 흰옷으로 덮이고 앉으면 농민들의 손에 쥔 죽창으로 빼곡하다 해서 '서면 백산(白山), 앉으면 죽산(竹山)'이라는 말도 이때 생긴 말입니다. 그러나 20만 동학 농민군도 일본식 신식 무기 앞에서 무참히 쓰러져 갔습니다.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 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에 대패했고습니다. 겨우 도피해 동학군 재건을 위해 애쓰던 전봉준은 내부자의 밀고로 관군에 체포됐고 일본의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동학 농민들의 반봉건, 반외세 저항 운동도 그 힘을 잃었고 녹두장군 전봉준의 '파랑새' 노래만 서럽게 남아 있습니다.
유네스코 유산이 되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에 등재권고를 받은 기록물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동학농민군의 임명장, 회고록 등 동학농민군 기록, 동학농민군 진압에 가담한 관료 및 진압군의 공문서와 보고서 등 조선 정부 기록, 민간인의 문집 및 일기 등 민간 진압 기록, 개인들이 동학농민혁명을 목격하거나 전해들은 내용을 기록한 개인 견문 기록 등 185건(약 13,132면)입니다.
역사적 의의
한때 민란으로 왜곡됐던 동학농민혁명, 전쟁과 운동으로 불리다가 4년 전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면서 혁명으로 명예를 되찾았습니다. 지난 2004년 3월 특별법이 제정되고 14년이 지난 2018년 11월, 우여곡절 끝에 동학농민군이 황토현 전투에서 최초로 관군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5월 11일을 '동학농민혁명기념일'로 지정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피지배 계층을 중심으로 아래로부터 진행된 민중항쟁이었으며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대규모 농민 대중에 의한 혁명이었습니다. 고부에서 시작된 농민들의 대항쟁은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을 무너뜨리고, 시대에 뒤떨어진 제도를 고쳐 근대 사회로 전환하는 디딤돌을 놓았죠. 무엇보다 낡은 사회를 개혁하고 외세의 침략에 맞서는 위대한 운동 전통을 세움으로써, 1894년 이후 전개된 의병항쟁, 3·1독립운동과 항일 무장 투쟁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회개혁 운동과 자주적 국권 수호운동으로서 한국의 근대화와 민족민중운동의 근간으로 결국 완성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