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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대통령실의 첫 번째 국민제안 토론에 대한 단상
2023-01-20 08:00:00 2023-01-20 08:00:00
대통령실은 ‘국민제안’ 누리집의 온라인 국민참여 토론의 첫 번째 주제로 ‘동네서점의 장기 재고도서 자율 할인판매 허용(도서정가제 적용 제외)’을 내걸고 1월 9일부터 2월 9일까지 국민 의견을 듣고 있습니다. 지역의 소규모 영세 서점에 한해 일정 기간(예를 들어 출간 후 3년)이 지난 도서를 자율적으로 할인판매가 가능하도록 하여 동네서점에서 팔리지 않는 악성 재고도서에 대한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는 제안에 대한 토론의 장입니다. 토론 주관자인 대통령실은 “독서문화 증진과 출판?도서산업 활성화에 기여하면서 영세한 동네서점도 살릴 수 있는 도서정가제 적용 제외 방안에 대한 국민 여러분들의 다양한 의견을 들려주세요”라고 이번 토론의 취지를 안내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온라인 토론 공간에 올라온 의견(1월 19일 오전 11시 기준 943건, 동일인의 다수 복수 의견 포함)의 대부분은 해당 주제와 초점이 맞지 않는 정가제 찬반 의견들입니다. 특히 전자책, 웹소설, 웹툰 등 전자출판물에 대한 도서정가제 적용이 부당하니 정가제 대상에서 제외하라는 의견이 많습니다. 그런데 현행 도서정가제는 ISBN(국제표준도서번호) 등의 식별자가 붙은 전자출판물의 ‘판매’에 대해서는 정가 판매 의무를 부여하므로, 그러한 식별자를 붙이지 않거나 ‘대여’의 방식으로 판매하는 경우 얼마든지 가격 할인이 가능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서비스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서점계에서는 국민제안의 제안자가 일반 서점 종사자가 아니라 전집 할인매장 사업자일 것이라거나 지역 총판(출판사 책을 서점에 공급하는 지역 판매 대리점)일 것이라는 등 추측이 무성합니다. 그렇지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제안 내용이 얼마나 타당한 것이며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 살피는 일이 핵심이라고 봅니다.
 
구간 도서의 할인 문제는 우리 도서정가제 역사에서 뇌관 중 하나입니다. 2014년 11월부터  개정 시행된 현행 도서정가제 시행 이전에는 발행 후 18개월이 지난 구간 도서에 대한 할인율 제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서점에서 반값 할인, 심지어 신간에 구간을 거의 공짜로 끼워주는 1+1 판매까지 성행하며 유통질서가 무너지고 책값의 신뢰도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광폭 할인이 가능한 곳들만 성장하고, 출판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소형 출판사와 소형 서점들은 할인 광풍 속에서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다수 지역서점들이 사라졌고, 할인을 많이 하는 책들이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올랐습니다. 이러한 광폭 할인이 2014년 출판문화산업진흥법 개정으로 사라지며 출판시장 질서가 비로소 안정되었습니다.   
 
따라서 일정 기간이 지난 구간에 대해 소규모 동네서점에만 할인을 허용하자는 제안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매우 제한적인 악성 재고의 할인 판매로 지역서점을 살리기도 어렵거니와 도서정가제 질서를 무너뜨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악성 재고’의 의미가 충족되려면 단순히 발행일부터 3년 이상 경과한 것이 아니라, 해당 도서를 서점이 매입한 날로부터 3년이 되어야 하는데, 이를 일일이 증빙하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3년 전에 발행되었지만 꾸준히 팔리는 책을 서점이 새로 주문해서 판매하는 경우 악성 재고와 어떻게 구별할까요. 제안자의 의견대로 하면 지역 소형서점은 구간 도서의 할인매장으로 변질될 것입니다. 중고서점과 다를 바 없습니다. 또한 악성 재고가 과도하게 쌓일 정도로 무리하게 도매상이나 출판사와 거래하는 서점은 거의 찾기 어렵습니다. 필요한 책을 필요한 부수만큼 소량 주문해서 판매 추이에 따라 재고를 관리하는 것이 일반적인 서점 경영 방식입니다. 위탁판매와 반품 제도를 활용하면 악성 재고 문제를 원천적으로 막을 수도 있습니다.     
 
왜 이 문제가 하필이면 새 정부의 첫 번째 국민참여 토론 주제가 되었는지, 그 적절성에 의문이 갑니다. 정작 서점계조차 공감하지 못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실이 책과 서점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악성 재고 할인’은 공론의 장에 붙일 만한 적절한 주제가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책 읽는 나라를 만들 수 있을까’였다면 더 많은 국민이 참여하는 생산적인 토론의 장이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 출판평론가(bookclub21@korea.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재범 대중문화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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