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의도는 분명 명확했다. 장르적 분위기 그리고 그 분위기를 압도하는 존재감. 배역의 크고 작음, 이건 큰 상관이 없었다. 단 번에 시선을 사로 잡아서 이 영화의 전체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휘어 잡아야 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가 출연하는 장면에선 긴장감이 순식간에 치솟았다. 배역 역시 극중에서 이 같은 긴장감을 끌어 올리는 역할을 했다. 그가 출연하면 극 전체를 이끌어 가는 두 캐릭터들도 긴장하긴 마찬가지다. 그의 존재 유무에 따라서 얘기의 흐름이 맥을 잡았다 풀었다, 이 과정을 반복하는 듯했다. 지상파 채널 KBS와 충무로 영화 제작사 아센디오가 함께 한 공포 영화 ‘귀못’. 그리고 ‘귀못’ 속 전체 얘기의 흐름 속도를 조율하는 독특한 캐릭터 ‘김사모’를 연기한 정영주. 뮤지컬계에선 대모로 불리는 정영주. 그는 스크린에선 장르가 명확한 그리고 규모가 주목되지 않는 타이트한 느낌의 작품에만 집중적으로 함께 해 왔다. 이번 ‘귀못’ 출연은 정영주가 명확하게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장르와 규모의 영화, 너무 오랜만이고 반갑고 또 즐겁게 작업했단다. 정영주와 함께 한 ‘귀못’에 대한 얘기는 이랬다.
배우 정영주. 사진=KBS 한국방송
정영주가 ‘귀못’에서 연기한 ‘김사모’는 이름이 아니다. 김씨 성을 가진 ‘사모님’에 대한 호칭. 큰 저수지가 한복판에 있는 시골 작은 마을. 이 마을에서 가장 큰 집. 이 집의 명목상 주인이다. 실질적인 주인은 제 정신이 아닌 듯한 ‘왕씨 할머니’. 이 할머니에 대한 마을 소문은 흉흉하다. 특히 이 집에 대한 소문 그리고 저수지에 대한 소문까지. 김사모는 이런 소문이 별로 개의치 않다. 원하는 게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김사모가 정영주는 너무 매력적이었다고.
“출연 분량도 많지 않은 데 배우의 센 기운이 필요한 캐릭터였어요. 제가 기운이 말랑한 배우는 아니잖아요(웃음). 이 배역을 연기하기 위해선 박하나의 캐릭터 그리고 허진 선생님의 캐릭터와 대결하면서 두 사람에게서 실 같은 걸 조금씩 뽑아 내야 했어요. 그래서 분량은 많이 않았지만 정말 온 신경을 집중해서 하다 보니 온 몸에 땀이 날 정도였어요. 진짜 오랜만에 연기하는 맛 제대로 느꼈죠.”
그는 이번 작품 출연 결정의 가장 큰 이유로 과거 지상파 방송사의 클래식한 프로그램으로 여겨졌던 ‘단막극’을 떠올렸단다. 사실 ‘귀못’을 정영주는 KBS가 제작한다고 해서 과거 폐지된 ‘TV문학관’으로 여겼다고. 개인적 취향으로 너무 좋아했던 프로그램이란다. 막상 관계자와 미팅을 했을 때는 영화란 소식에 더 놀랐다고. ‘TV문학관 스타일’의 향수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이고, 그런 향수를 이 기회가 아니면 오랫동안 느낄 수 없을 것 같았다고.
영화 '귀못' 스틸. 사진=KBS 한국방송.
“’TV문학관’은 제가 진짜 좋아하던 프로그램이에요. ‘귀못’이 그 느낌이 강했죠. 한편으론 KBS에서 하는 ’독립영화관’ 느낌도 강했고, 한 편으론 ‘전설의 고향’ 속 에피소드 같기도 했어요. 시나리오 받고 읽어본 뒤 처음에는 KBS의 단막극이 부활하는 줄 알고 무조건 한다고 했죠(웃음). 물론 영화라고 알게 된 뒤에도 출연 결정 마음은 바뀌지 않았죠. 잘만 만들어 지면 진짜 볼만하겠다 싶었어요.”
정영주가 연기한 ‘김사모’는 극중 주인공 ‘왕씨 할머니’의 유일한 혈육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살가운 혈육이 아닌 ‘왕씨 할머니’가 숨긴 보물을 노리는 악한 마음의 성격을 가진 인물이다. 물론 포인트는 ‘유일한 혈육’이란 점. 정영주는 극중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왕씨 할머니’와 연결된 유일한 혈육이란 점에서 시나리오를 철저히 분석해 앞뒤 맥락을 이어갈 보이지 않는 설정을 만들어 냈다. 정영주가 생각하고 그린 ‘왕씨 할머니’는 이랬다.
“뭐 극중에서도 그려지지만 엄청난 부자였잖아요. 남편이 죽으면서 막대한 유산을 남겼고. 그리고 혼자 딸을 키우며 살았겠죠. 그 시절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성에게 얼마나 많은 검은 유혹이 있었겠어요. 근데 그 많은 유산을 딸과 함께 행복하게 살면서 쓰기도 전에 불행을 맞았고. 자식을 잃었고 점점 미쳐가는 숙모인 ‘왕씨 할머니’를 보면서 다른 생각을 품는 조카인 ‘김 사모’. 진짜 묘한 느낌이 오지 않으세요(웃음)”
배우 정영주. 사진=KBS 한국방송
‘귀못’에는 2030세대는 물론 4050세대에게도 낯선 배우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미 드라마는 물론 1970년대 최고 스타로 군림하던 원로 명배우 허진이 출연한다. 허진은 극중 ‘왕씨 할머니’를 연기하는 데 이미지부터 연기 그리고 아우라까지. 그 어떤 것 하나 빠지지 않을 정도로 ‘왕씨 할머니’ 그 자체였다. 섬뜩한 느낌부터 기괴한 느낌까지, 허진이 아니면 도저히 흉내내지 못할 연기뿐이었다. 하지만 현장에서의 허진은 전혀 달랐단다. 정영주는 대선배 허진의 현장 모습을 이렇게 전했다.
“우리 선생님, 진짜 너무 단아하신 ‘아가씨’이셨어요. 정말 뭐랄까, 고전적 배우의 단아한 태도가 몸에 스며 들어 계신 천상의 배우셨어요. 선생님께서 살아오신 부분에 대한 말씀을 저희 후배들에게 정말 많이 해주셨어요. 선생님이 예전에는 최고의 스타이셨는데, 당시 겸손하지 못했던 것에 후회한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무조건 겸손해야 한다고 저희에게 당부하셨어요. 마지막 촬영에선 저희 모두 안아 주시면서 우셨어요. 진짜 너무 고우신 분이세요.”
기본적으로 ‘귀못’은 공포와 호러 장르다. 이런 장르의 영화는 촬영 현장에서 벌어진 기이한 에피소드가 많다. 정영주에게도 물어봤다. ‘귀못’ 촬영 현장에서 벌어진 무서운 경험. 곰곰이 생각하던 정영주는 순간 무릎을 치면서 ‘있었다’고 소리쳤다. 귀신을 본 것은 아니란다. 하지만 출연 배우 모두가 한 순간에 뭔가를 느낀 적은 있었다고. 그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오싹할 정도라고.
영화 '귀못' 스틸. 사진=KBS 한국방송.
“특별하게 현장에서 뭔가 이상한 걸 보거나 그런 적은 없는데, 모든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순식간에 얼어 붙었던 적이 있긴 있었어요. 뭐라고 설명이 안되는 데, 왕씨 할머니 집 내부 세트 촬영을 할 때 였어요. 뭔가 특별한 게 보인 게 아니라 순식간에 세트 안 공기의 흐름이 ‘싹’하고 얼음장처럼 변한 적이 있었어요. 저만 느낀 게 아니라 그 순간 모든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다 느끼고. ‘아우 뭐야’ 이랬다니까요. 하하하.”
평소 공포 장르를 너무 좋아한다는 정영주다. 함께 출연한 박하나 역시 공포 마니아라고 자신을 소개할 정도였다. 두 명의 공포 마니아 배우가 출연해 극을 이끌어 갔으니 이 영화의 ‘무서움’은 굳이 설명 안해도 될 정도일 듯하다. 정영주는 ‘귀못’의 임팩트가 웬만한 공포 영화보다 더 센 느낌이 들 것이라고 추천했다. 자신이 공포 마니아라면 ‘귀못’은 결코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라고 강하게 추천했다.
배우 정영주. 사진=KBS 한국방송
“제가 진짜 좋아하는 공포 영화가 ‘파라노말 액티비티’에요. ‘컨저링’도 진짜 좋아하고. ‘이블 데드’ 같은 피 범벅 영화도 너무 좋아해요. 특히 ‘파라노말 액티비티’는 처음 보고 나서 집에서 3일 정도 잠을 설쳤어요. 그럼 안 봐야 하는데 또 자꾸 봐요(웃음). ‘귀못’도 그런 매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보면 자꾸만 생각나는 무서움 이랄까. 나무 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고이는 것처럼 그 음습한 느낌. 하하하. 공포 마니아 여러분 도전해 보세요!”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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