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가장 가깝지만 반대로 가장 먼 관계일 수 있다. 엄마와 딸이 그렇다. 정신분석학적 시선에서도 상당히 많이 등장하는 관계다. 정서적 유대감에서 엄마는 아빠보다 아들 혹은 딸에 대한 감정적 투여가 더 극단적으로 치우질 수 있다. 우리 정서에서 엄마의 역할은 일상의 시선으로 옮겨 본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걸 받아 들이는 자녀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과도한 집착과 흘러 넘치는 감정의 집중을 어떻게 소화하고 또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적절한 소비를 하는지에 따라 정서적 유대의 깊이는 다르게 작동된다. 복잡하지만 의외로 간결한 관계성, 모녀의 관계가 특히 그렇다. ‘애증’이란 단어로 흔히 설명되지만 그 이상의 감정 교류가 만들어 낸 깊이는 그래서 종종 극단적 상황을 통해 등장한다. 모자간의 관계가 지배와 피지배의 완벽한 정서적 수직 관계로 그려진다면 모녀 관계는 그래서 경계의 의미가 점차 흐려지는 동질감, 나아가 극단적 상황에선 자신을 완벽하게 분리시켜 타자화 시켜 버리는 단계로까지 넘어간다. 그 주체는 엄마일 수도 있고, 또 딸이 될 수도 있다. 영화 ‘앵커’는 그 단계로 넘어간 상황에서 발생되는 엄마와 딸의 끔찍한 타자화 시선이 만들어 버린 심리극이다.
‘앵커’에는 성공한 딸 정세라(천우희) 그리고 세라의 성공에 더욱 더 집착하는 엄마(이혜영)가 등장한다. 엄마는 우리 주변에서 너무도 흔한 자식 위해 헌신한 딱 그 모습이다. 하지만 어딘가 좀 이질적인 느낌이다. 딸 세라와 엄마의 관계, 기묘할 정도다. 영화적 설정과 연출의 ‘결’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 관계, 묘한 긴장감과 이질감을 동시에 뿜어낸다. 아마 세라의 내제된 불안감과 자격지심 그리고 그걸 직시하는 엄마의 시선이 관객들의 심리를 자극했기 때문일 듯하다.
영화 '앵커' 스틸.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세라는 간판 스타 앵커다. 방송국 메인 뉴스 ‘9시 뉴스’ 앵커. 젊은 나이에 모든 것을 이뤄낸 스타다. 남편은 잘 나가는 펀드 매니저. 한 눈에 봐도 좋은 아파트에 산다. 성공한 인생이다. 하지만 불안하다. 열등감이 크다. 영화 제목 ‘앵커’가 힌트다. 세라는 메인 뉴스 엥커이지만 아나운서 출신. 기자 출신이 아닌 아나운서 출신으로서 방송국에서 그의 입지는 언제나 위태롭다. 자신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후배 여기자들 시선이 항상 옥죈다. 초조하고 쫓기는 기분이다. 하지만 포장한다. 세라는 언제나 당당하다. 스타로서, 메인 뉴스 엥커로서. 그는 당당해야 한다.
영화 '앵커' 스틸.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문제는 그런 세라를 공격하는 사람이다. 다름 아닌 엄마다. 세라의 가장 아픈 곳, 바로 아나운서 출신이란 점. ‘언제까지 써 준 글 앵무새처럼 읽어댈 거냐’라 찔러대는 엄마의 독설. 숨이 막힌다. 회사에선 하루가 다르게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 공교롭게도 방송국은 개편시즌이다. 메인 뉴스 엥커 자리는 당연히 세라의 몫. 하지만 뭔가 ‘굳히기’가 필요하다. 그런 분위기 속 세라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제보 전화. 누군가로부터 살인을 예고한 제보. 세라는 장난 전화라 여긴다. 하지만 엄마는 성공에 대한 통찰력이 있다. 지금의 세라를 만들었다. ‘진짜 앵커가 될 기회다. 그걸 잡아라’라고 조언한다. 성공을 위해 아나운서에서 기자로 전직까지 하며 앵커 자리를 지켜온 세라. 엄마의 조언을 듣고 제보 전화를 직접 취재 하기로 마음 먹는다.
영화 '앵커' 스틸.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취재 현장에서 세라는 끔찍한 상황을 목격한다. 욕조에 빠져 죽어 있는 여자 아이 그리고 장롱에 목을 매 죽은 20대 여성. 경찰 조사 결과 이 여성은 세라에게 전화를 걸었던 여성이다. 그리고 여자 아이와 여성은 모녀 사이. 엄마인 여성이 아이를 목 졸라 살해한 뒤 자신이 목을 매 죽은 것으로 조사가 마무리됐다.
하지만 현장에서 우연히 피해 여성 정신과 주치의였던 인호(신하균)를 만나게 된 세라. 세라는 인호에게서 미심쩍은 의심을 느낀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세라는 방송국에서 단독 프로그램 진행 등 더욱 더 승승장구할 기회까지 잡는다. 욕심이 생겼다. 세라는 인호를 파고 든다. 인호는 최면을 통해 정신과 치료를 하는 정신과 전문의. 세라는 살인 사건을 목격한 유일한 목격자. 인호의 최면을 통해 사건의 실체를 캐내려 노력한다. 하지만 최면에서 세라가 마주한 건 그 동안 자신을 괴롭혀 오던 내면 속 심리 실체. 이제 세라는 현실 속 상황과 내면 속 보이지 않는 상황이 혼돈되며 걷잡을 수 없는 현실에 불안감이 커진다. 그와 동시에 자신을 더욱 더 압박하는 엄마, 남편과의 이혼까지 종용한다. 세라는 극단적 상황으로 몰리면서 현실과 상상의 중간 어디쯤에 갇혀 버린다.
영화 '앵커' 스틸.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앵커’는 심리의 불안감이 극단적 상황으로 몰릴 경우 나타나는 병리학적 개념의 정신과적 시선이 많이 투여돼 있다. 시나리오와 연출을 맡은 감독 역시 이 같은 내용을 많이 인지하고 또 취재와 공부를 한 뒤 이 작품을 구상한 듯 보인다.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품 ‘거울’이 이를 증명한다. 거울은 필연적으로 현실 속 실체를 마주하고 담아낸다. 하지만 거울 속 실체가 실재인지에 대해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분열된 자아 혹은 내면 속 또 다른 본질이 투여될 때 거울은 진짜 자아와 그 이상을 넘어선 초자아의 경계를 의미하는 단순한 시선에 불과하게 된다. ‘앵커’는 그 단계까지 넘어가면서 이 모든 것을 세라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관객들의 심리를 분리시켜 세라의 불안과 엄마의 불안을 객관화 시킨다.
‘앵커’ 전반을 지배하는 불안은 이 단계까지 접어든다면 캐릭터들의 몫이 아닌 관객의 몫으로 전환된다. 여기까지 온다면 감독의 의도는 완벽하게 적중한다. 캐릭터를 이용하고 감정을 배치하며 그 흐름 속에서 스토리를 의식적으로 대입시킨 시나리오 작법은 상당한 완성도를 자랑한다. 데뷔 감독 솜씨로 보기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영화 '앵커' 스틸.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앵커’가 완벽하게 닻을 심연 밑바닥까지 떨궈버린 힘은 온전히 배우들 연기에 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세라를 연기한 천우희 그리고 그의 엄마를 연기한 이혜영은 ‘앵커’ 전체를 이끄는 완벽한 장치이자 감정 그 자체다. 신하균의 존재감 역시 감정 자체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의심’의 영역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문제는 연출이다.
‘앵커’는 감정이 지배하는 심리극이다. 감정은 실체와 답이 없는 무형이다. 시선에 따라 생각에 따라 의식에 따라 무형은 유형으로 변화된다. 그 핵심은 결국 연출의 힘이다. 치밀할 정도로 계산된 연출이 필요했다.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중반 즈음 이 영화의 핵심 스포일러를 잡아낼 수 있다. 끝까지 유지하지 못한 감독의 세밀한 연출의 힘이 아쉽다.
영화 '앵커' 스틸.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물론 연출을 제외한다면 ‘앵커’는 모든 면에서 ‘상당히’란 표현을 넘어선 치밀한 심리극이다. 누구라도 세라가 될 수 있고, 누구라도 그의 엄마가 될 수 있다. ‘아니다’고 부인할 수 있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개봉은 오는 20일.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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