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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익도의 밴드유랑)'작은 거인' 김수철과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

'한강의 기적' 만큼 장대한 음악 반석…'국악 대중화' 공연 역사 새 챕터

2023-10-13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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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정신차려’라는 곡명과 반대로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이 미친 천재 음악가, 모든 곡들을 홀로 다듬으며 국악과 양악에 투신한 음악 열혈 45년 사(史)가 한국적 질곡과 미학의 아리랑처럼 그의 두 손 끝에서 피어오를 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강의 기적' 만큼이나 장대한 '반석(盤石)', 이것은 바로 '작은 거인' 김수철이 한국 대중음악사에 새긴 궤적이란 사실을.
 
1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막이 오르고 무대 중앙 턱시도에 나비넥타이 차림으로 등장한 김수철이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를 등 지고 90도로 인사하는 순간, 박수 갈채와 함성이 쏟아지는 것을 보며 우리 음악, 공연 사의 새 챕터가 열리는 순간이라 생각했습니다.
 
1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무대 중앙 턱시도에 나비넥타이 차림으로 등장한 김수철이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와 함께 선 무대. 사진=세종문화회관
 
첫 순서 '팔만대장경 1악장 서곡 : 다가오는 구름'을 시작으로 음의 진경을 수묵화처럼 펼쳐내는 거대한 울림은 압도적이었습니다.
 
국난극복이라는 민족의 염원과 의지로 만들어진 세계문화유산 ‘팔만대장경’을 음악적으로 표현한 곡. "우리나라에 딱 두 대 뿐"이라는 2대의 대북과 소북들의 리듬 향연, 이어 현악 4 중주로 출발해 거대한 필하모닉으로 번지는 바람처럼 투명한 선율들. 이 동양적이며 신비로운 소리들은 김수철이 "평생에 걸쳐 연구해왔고 앞으로도 프로젝트로 진행할" 음악이라는 선언과도 같았습니다.
 
코리아모던필하모닉오케스트라를 중심으로 한 양악 현악기들과 타악, 그리고 피리, 대금, 가야금 등의 국악기 명인들이 합쳐 만들어내는 유려한 음의 이색적인 교합은 우리 악기와 가락을 서양 악기, 리듬과 접목시킨 ‘불림소리II’의 '야상'에서 극대화되더군요.
 
오케스트라와 국악의 뉴에이지 곡으로 펑키리듬과 휘모리장단으로 배합하여 작곡한 이 노래를 시작으로 동서양 악기 소리가 황금비율을 이루는 '소통'(2002 한일월드컵 주제곡)으로 이어지자 숨을 죽이고 있던 객석에선 박수와 함성이 터져나왔습니다.
 
소금 독주를 양악 오케스트라가 이어받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의 주제곡 '소리길'(국내 최초의 O.S.T이자 국악 음반 사상 최초 100만장 이상 판매) 순서에서는 뒤 화면에는 남도의 아름다운 자연풍경과 우리네 한이 서려있는 영상미가 감성을 자극했습니다.
 
1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김수철과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김덕수 명인과 김수철이 합주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세종문화회관
 
"제가 40년 이상 국악을 해왔습니다. 15년 전부터 (국악과 양악을 연결시키는) 이런 공연을 하려 했는데 기업 후원을 못받아서 자비로라도 할까 생각하던 차였습니다. 그러다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저를 찾아주셔서 이렇게 오늘 이 자리에서 선보이게 됐어요. 우리 국악은 재미없거나 감동이 없지 않습니다. 오늘 이 자리를 계기로 우리 문화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길 바라겠습니다."
 
이날 공연의 최대 백미 중 하나는 김덕수 명인과 함께 꾸민 '기타산조' 무대. 김덕수의 장구 장단에 맞춰 김수철이 앰프를 연결한 기타 연주로 한국적인 선율들을 대화처럼 나누는 정경을 펼쳐냈습니다. '기타산조'라는 신장르를 개척하고 2002년, 그는 본보 기자와 인터뷰 당시에도 UN본부 총회의장에서 코피 아난 당시 UN 사무총장을 비롯해 각국 대표자들을 앞에 두고 10분 넘는 연주를 뿜어낸 순간을 '인생의 순간'으로 꼽은 바 있습니다. 
 
솔로 활동 이후 ‘못다 핀 꽃 한 송이’, ‘젊은 그대’, ‘정신 차려’, ‘나도야 간다’ 등 숱한 히트곡들은 양희은, 이적, 성시경, 백지영, 화사 같은 선후배가수들의 목소리로 새롭게 재해석해 선보였습니다. 하이라이트는 "치키치키차카차카"로 유명한 '날아라 슈퍼보드'와 세대 초월 대학생들이 즐겨부르는 '젊은 그대'. 100인조 오케스트라가 합세해 장대한 스케일로 변주된 명곡의 힘은 자리를 박차고 관객들을 일으켜 세울 정도라는 것을 느끼게 해줬습니다.
 
평화의 강물처럼 흘러가는 연주, 그러나 악기로 직접 따본다면 기존 틀을 뒤엎는 코드와 화성진행, 'E'에서 'F#'으로 진행을 갑작스레 바꾸는 ‘못다 핀 꽃 한 송이’ 같은 곡은 클래식 오케스트라의 어마한 음압을 만나 여전히 ‘아 여보게, 정신 차려, 이 친구야!’ 말을 건네오더군요. 
 
1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김수철과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 공연. 사진=세종문화회관
 
올해 45주년을 맞은 김수철은 이제 리틀 자이언트(작은 거인)가 아닌, 그냥 자이언트라 불러도 손색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번 공연 같은 기회가 많아져야 국악의 대중화도 성큼 다가오지 않을까. 올해 초 본보 기자와 인터뷰에서 백남준의 미디어 파사드쇼, 앙드레김의 패션쇼가 한때 그의 음악 일부로 존재했던 시절을 환기한 그는 "문화를 현실화시키는 것은 결국 예산"이라며 "요즘의 케이팝 등 대중예술의 성취에는 사실 우리 것이 너무 없다. '순수예술의 세계화'도 이뤄야 진정 문화 강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고 한 바 있습니다.
 
70대 관객 강신욱 씨는 "서편제와 월드컵 개막식 곡 등을 100인조 오케스트라로 들어보니 눈물이 날 정도로 좋았다"며 "김수철씨가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는 부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에게도 국악이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했습니다.
 
50대 관객 이미화 씨는 "김수철씨의 음악을 동서양 악기들의 화합으로 이렇게 새롭게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고 했고, 아들인 20대 박건훈 씨는 "김수철 선생님을 잘 몰랐지만 '날아라슈퍼보드'나 '젊은 그대' 같은 곡을 듣고 '우리 삶과 함께 한 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20대 입장에서도 충분히 매력을 느낄 만한 음악 요소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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