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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러시아재발견 30화)‘러시아의 길’을 찾는 사람들
2020-08-03 06:00:00 2020-08-03 06:00:00
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피의 교회 앞에는 대형 십자가를 둘러싼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가족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사진/필자 제공
 
전략적 동반자, 종교와 정치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와 그 가족을 1981년 ‘순교자’로 시성했던 해외 러시아 정교회와 2000년 ‘열렬히 견딘 자’로 시성했던 러시아 국내의 정교회는 2007년 재통합됐다. ‘열렬히 견딘 자’, ‘열정적으로 인내한 자’로 직역될 수 있는 러시아어 ‘스트라스토쩨르뻬쯔’(passion-bearer)는 가톨릭에는 없고 정교에서만 사용되는 개념이다. 이는 순교자처럼 종교적 신념으로 인해 박해와 죽임을 당한 자가 아니라, 신앙심을 유지하면서 ‘선한 본성’이라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성취하기 위해 악의나 중상모략을 견디면서 살해된 자를 뜻한다.
 
황제와 그의 가족이 볼셰비키 정권에 의해 ‘무고’하게 처형되어 이 정의에 적합했던 건지는 모르겠으나, 러시아 역사상 이 명칭으로 성인의 반열에 오른 이들이 왕가 구성원에 국한돼 왔음을 볼 때 그 불공평함에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차르 니콜라이 2세처럼 전제 군주는 성인이 될 수 있지만, 민중은 경건한 신앙심을 가지고 의로운 죽음을 당해도 이 명칭의 성인이 되지 못하니 말이다.
 
예카테린부르크 피의 교회 전경. 정식 명칭은 '러시아 땅에서 빛나는 모든 성인들의 이름으로 피의 기념 교회'이다. 사진/필자 제공
종교와 정치의 친밀한 공조 관계는 전혀 낯선 일이 아니다. 러시아 정교회의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 역시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한다. 사회주의 혁명 이후 망명자들이 해외 러시아 정교회를 조직하긴 했지만 국내에서는 소련 정부에 순종적인 정교회가 유지돼 왔고, 소련 붕괴 이후의 정교회는 다시 정치권과 러시아 사회 전반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피의 교회와 그 근처 황제가족박물관에서 느끼게 되는 마지막 황제 가족의 신성화가 나에게는 당혹스럽다. 그러나 뜰 안 한쪽, 니콜라이 2세를 기리는 십자가에 경배하는 두 러시아 여성들을 보니 신자들이 황제의 시성을 바랐다는 것도 일면 납득이 가면서, 문득 1994년 가을 러시아 정교를 처음으로 가까이서 관찰했던 그 날들을 떠올리게 된다.
 
성인의 반열에 오른 니콜라이 2세 가족의 이콘(성화)이 황제가족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사진/필자 제공
 
옵티나 푸스틴에 관한 기억
 
1994년 10월 20일, 나는 러시아 철학과의 친구 올랴 그리고 그녀의 다른 친구 한 명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약 260킬로미터 떨어진 칼루가 주 코젤스크의 정교회 수도원 옵티나 푸스틴(‘옵타의 암자’라는 뜻)에 도착했다. 러시아 철학 수업을 듣다가 친해진 올랴는 독실한 정교 신자였는데, 어느 날 내게 러시아 정교의 축제에 가지 않겠냐고 권유했다. “축제라니! 오, 물론 가야지!” 축제라기에 흥겹게 놀 것이라 생각한 나는 반색하며 따라나섰다.
 
1994년 10월 20일 러시아 철학 전공인 친구 올랴(가운데)와 그녀의 친구(오른쪽, 이름을 잊었다)와 함께 옵티나 푸스틴에 도착했다. 둘 다 독실한 러시아 정교 신자다. 사진/필자 제공
 
수도원은 많은 신자들로 붐볐고 복원을 위해 공사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축제 참여를 위해 온 신자들 중 여성의 비율이 높았기 때문에 여자 숙소는 자리가 꽉 차 우리들은 밤에 숙소의 바닥에서 잤다. 나는 그 많은 인원에 놀랐고, 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곳곳에서 부활되는 교회와 수도원, 정교 문화의 확산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느낌이었다.
 
정교의 예법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갔던 나에게 그곳에서의 체험은 2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수도원에 들어갈 때부터 일이 시작됐는데, 예법을 몰라 머리 수건을 쓰지 않은 나의 머리에 누가 뒤에서 거칠게 스카프를 뒤집어씌우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어떤 러시아 할머니가 화를 내며 나무란다. 먼저 말이라도 하고 씌우실 것이지... 황당해하는 나를 보고 올랴가 미리 알려주는 걸 깜빡 잊었다며 미안해한다. 치마도 필요해 올랴의 여벌 치마를 빌려 내 바지 위에 그대로 걸쳐 입었다.
 
정교의 축제는 즐겁게 노는 것이 아니라 경건한 예배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나는 곧 깨달았다. 가장 인상적이고 놀라웠던 점은 예배 내내 서 있어야 한다는 것과 예배시간이 길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선 채로 2시간 예배 보고 한 20분 쉬고, 3시간 예배 보고 30분 휴식, 4~5시간 예배 보고 1시간 정도 쉬는 식으로 계속되니 다리가 너무 아파 앉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뒤편에 의자가 몇 개 마련돼 있긴 했지만 노약자를 위한 것이었고, 게다가 할머니들조차 그 의자에 앉지 않고 내내 서 계시니 당시 20대였던 내가 어찌 앉을 수 있으랴. 러시아 정교의 엄격한 예식에 그리스 정교회의 수장도 놀랐다 하고, 예배를 보던 러시아의 귀족 부인들이 도중에 픽픽 쓰러졌다는 말도 과장은 아니겠다.
 
1994년 10월 21일 옵티나 푸스틴. 정교회 사제들이 수도원 뜰에 있는 종들을 울리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옵티나 푸스틴은 남자수도원으로,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조시마 장로가 머물렀던 수도원의 모델이기도 하다. 1878년 세 살 난 막내아들 알료샤를 병으로 잃고 실의에 빠진 도스토옙스키를 러시아의 철학자·종교사상가이자 시인인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가 옵티나 푸스틴으로 이끄는데, 거기서 작가가 만난 암브로시 장로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조시마 장로로 형상화되고 세상을 떠난 그의 아들의 이름은 카라마조프가의 셋째 아들, 선한 인물의 대표인 수련 수사 알료샤에게 주어졌다.
 
수도원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점심 한 끼를 먹을 수 있었는데, 신자들이 구내식당에서 매우 소박한 식사(죽과 샐러드)를 묵언 속에 하는 동안 수사님들이 번갈아가며 성경을 낭송한다. 일종의 문화적 관찰자였던 나는 축제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한 채 2박3일 만에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독실하고 경건한 정교 신자였던 올랴와 그녀의 친구는 그곳에 남았다. 내가 먼저 떠나던 날, 사제들이 예배 후 밖으로 나와 성수를 뿌리고 행진을 하는데 얼떨결에 내 머리도 성수를 맞았다. 당황하는 나를 친구들이 부러워한다. 짧은 동안의 ‘고행’ 같았던 축제는 귀한 경험과 배움을 얻은 감사한 시간으로 그렇게 기억에 새겨졌다.
 
1994년 10월 22일 옵티나 푸스틴. 러시아 정교회 사제들이 예배 후 교회 출입구에서 성수를 뿌리고 행진을 하는 전례를 행하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슬라브파 대 서구파, 유라시아주의의 부활
 
2000년, 옛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KGB) 출신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푸틴은 9월에 솔제니친의 집을 방문해 대화를 나누었다. 2007년 6월 12일 국가문화공로상을 수여한 후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한 그를 만나기 위해 다시 그의 집을 찾은 대통령은 소련 시절 대표적인 반체제 작가였던 솔제니친과 ‘러시아의 현재와 미래’를 논한다. 이들의 결합이 갖는 함의는 슬라브주의, 러시아 민족주의와 애국주의, 러시아 정교의 전통과 같은 키워드들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유럽과 아시아에 광대하게 걸쳐진 러시아의 정체성과 역사적 발전 경로에 대한 고민은 러시아 지식인들에게 오랫동안 지속돼 온 문제였다. 1723년 새로 세워진 도시에 아내의 이름을 따 ‘예카테린부르크’라 명명한 표트르 1세(표트르 대제, 재위 1682~1725)는 루스 차르국을 ‘러시아 제국’으로 선포하고, 근대화를 위한 서구화 정책과 영토 확장을 꾀했던 황제다. 그러한 그의 정책은 예카테리나 2세(재위 1762~1796) 때 꽃을 피워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어로 말하고 쓰는 걸 즐겼으며 유럽 문화에 심취했다.
 
19세기 중반부터 러시아 지식인들은 서구파와 슬라브파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는데, 표트르 대제 시절부터 이어지는 서구주의의 특징은 서구의 기술과 합리적 사고 지향,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기초한 입헌 군주제 지지, 더 급진적인 경우 사회주의적 지향성도 띠었다. 반면, 슬라브주의는 전통적인 농촌 공동체(미르)와 러시아 정교회의 토양 위에서 러시아의 고유한 발전 방식을 찾으려 했다.
 
1920년대에 이르면 망명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유라시아주의가 주창되는데, 여기에서는 러시아가 가진 아시아적 특수성으로 인해 서방에 대한 정신적 우월성이 강조된다. 고전적 유라시아주의자들은 러시아 문화의 독자성을 고수하면서 ‘러시아의 이념’(Russian idea)과 그에 따른 ‘러시아의 길’(Russian way)을 모색했다. 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이 사상은 신유라시아주의로 발전해 푸틴 정책의 철학적 기저를 이루고 있다. 그는 왜 신유라시아주의를 자신의 정치철학으로 선택한 것일까?
 
황제가족박물관과 도서관 등이 있는 복합건물 전시실에 정교회 사제들과 관련된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필자 제공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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