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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게이션)‘기생충’, 가늠하기 힘든 봉준호란 그릇의 크기
‘양극화 문제’, 봉준호 감독 시선 그리고 사회의 시선 대비
계층 분화 은유, 장르 분절 없는 영화적 화법 압도적 표현
2019-05-29 00:00:00 2019-05-29 00:00:00
[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지난 25일 제72회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 폐막식 현장. 무대에는 경쟁 부문 마지막 상이자 전 세계 영화제 최고상으로 불리는 황금종려상 수상만을 남겨뒀다. 프랑스의 국민 여배우 까뜨린느 드뇌브, 영화제 심사위원장인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이 황금종려상수상작을 발표한다. “패러사이트, 봉준호.” 오는 30일 개봉하는 봉준호 감독의 일곱 째 연출작 기생충은 그렇게 한국 영화 100년사 최고의 업적을 일궈냈다.
 
 
개봉 이틀을 앞둔 28일 국내에서 언론시사회가 열렸다. 영화는 기괴하고 이상하며 함의적이고 또 의미심장했다. 사실 반대로 놓고 봐도 무방했다. 정말 단순한 논리로 접근하면 이건 영화라기 보단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의식하지 못했던 현실이었다. 이미 알려진 내용대로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낸 계층간의 보이지 않는 벽이 만들어 낸 현대 사회의 완벽한 민 낯이었다. 이건 영화적으로 투영된 결과물이기에 관객 입장에선 여러 은유와 비유 그리고 메시지를 읽으려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간단한 논리이다. 가진 자와 없는 자의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 대한 풍자적 시선이다. 날이 선 느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날이 마냥 시퍼런 날을 세우고 있지는 않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시대가 앞서 나갈수록 문화가 발달할수록 우리 사회가 잊고 사는 한 지점을 고찰한다. 봉준호 감독은 28일 언론시사회 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 영화는)예의에 관한 문제라고 언급했다. 나와 너, 우리와 너희, 우리와 사회로 나뉘면서 그 예의는 기생이 될 수도, 공생이 될 수도, 상생이 될 수도 있는 변화의 주체가 되는 셈이다. ‘기생충은 그 지점을 말하고 있었다.
 
영화 '기생충' 스틸. 사진/CJ 엔터테인먼트
 
봉준호 감독이 칸 영화제 현지에서부터 부탁한 스포일러 자제 요청이다. 공개할 수 있는 내용은 한정적이다. 기택(송강호)의 네 가족은 모두가 백수이다. 장남 기우(최우식), 차녀 기정(박소담), 엄마 충숙(장혜진). 이들은 집에서 피자집 포장 박스를 접으며 생활하는 전형적인 백수 가족이다. 그러던 어느 날 기우가 우연히 친구의 소개로 부잣집 고액 과외선생 자리를 맡게 된다. 이 집은 글로벌 IT기업 박사장(이선균)과 아내 연교(조여정) 두 사람의 딸 다혜와 아들 다송이 살고 있다. 기우는 다혜의 과외선생으로 일자리를 얻게 된다. 기우는 동생 기정까지 이 집의 과외선생으로 추천을 한다. 전원 백수 집안은 하루 아침에 아들 딸의 취직으로 일대 변화를 맞이한다. 행복한 일상이 찾아온다. 하지만 대가 없는 행복 뒤에는 언제나 큰 불행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기생충은 기우와 기정이 박사장네 집에 과외선생으로 연이어 취직을 하면서 벌어지는 연이은 사건이 이끌고 오는 상상 밖의 상황을 황당하고 엉뚱하며 충격적이고 웃긴 시선으로 잡아간다. 물론 종국에는 결코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으로 모든 것을 마무리시키며 관객들의 감정을 알 수 없는 공간으로 끌고 간다. 봉준호 감독이 공개를 허락한 내용은 여기까지이다. 여기까지가 영화 전체의 도입부가 된다.
 
영화 '기생충' 스틸. 사진/CJ 엔터테인먼트
 
이후의 기생충은 몇 가지 코드로 전할 수 있다. 우선 이다. 선은 무엇과 무엇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영화에서 선은 기택네 집과 박사장 집을 구분하는 선이 된다. 그 선은 보이지 않은 선이다. 박사장은 습관처럼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고 읊조린다. 그것은 기생충이 말하는 계층간의 구분을 짓는 우리 모두의 보이지 않는 선이다. 공교롭게도 그 선을 구분하는 것은 기택과 그의 가족이 아니다. 박사장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의 신분 상승을 막고 있는 보이지 않는 권력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 사회는 기택의 집과 박 사장의 집으로 구분된다. 그것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구분이 바로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선이다. 돈이 될 수도 있다. 돈이 아닐 수도 있다. 계층간 분화는 사실 돈이 아니다. 이미 우리 사회의 일원인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지만 알지 못한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고 있는 것뿐이다. 봉준호 감독은 그것을 직설적으로 언급했을 뿐이다. ‘이란 단 한 단어로 말이다.
 
영화 '기생충' 스틸. 사진/CJ 엔터테인먼트
 
두 번째는 냄새이다. 영화에서 계층의 구분은 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그것은 보이지 않은 것이다. 느껴야만 하는 것이기에 느끼고 싶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기생충에선 그것을 강제로 느끼게 한다. ‘냄새로 말이다. 두 집안의 구분은 결국 냄새로 압축된다. 그 냄새는 신분의 위치를 좌우한다. ‘기생충에선 이 냄새를 다루는 한 가지 상징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좁은 공간이다. 가진 자는 냄새 나는 발을 꺼내 들고 있다. 없는 자는 멀쩡하다. 하지만 가진 자는 없는 자의 냄새를 괴로워한다. 사실 그 냄새는 나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가진 자는 그 냄새의 통해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을 없는 자에게 증명시킨다.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와도 같은 빈부격차의 문제가 압축적으로 함의가 된 장면 중 하나이다. 지하철과 고급 승용차로 그 냄새를 표현한 방식이 직설적이면서도 따갑다. 그게 가진 자와 없는 자의 구분이라면 우린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기생충' 스틸. 사진/CJ 엔터테인먼트
 
세 번째는 공간이다. 반 지하가 등장한다. 반 지하는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에만 존재하는 공간이다. 세상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일어서야만 볼 수 있다. 반 지하는 상승의 여지를 두고 있는 공간이다. 그 공간에 담겨 있는 기택의 가족은 상승의 기회를 잡는다. 반면 박사장네 가족은 언덕 위에 존재한다. 높다란 언덕 위 거대한 저택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 위 공간이다. 높다란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벽 곳곳에는 CCTV가 있다. 가진 자는 자신들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을 거부한다. 자신의 허락이 아니면 그 공간은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다. ‘기생충에서 공간은 그런 곳이다. 보이지 않는 을 증명하기 위해, 을 확인시키는 냄새의 침입을 막기 위해 존재하는 공간 말이다. 종국에는 두 공간의 벽을 허물어 버리는 제 3의 공간이 영화에는 등장한다.
 
영화 '기생충' 스틸. 사진/CJ 엔터테인먼트
 
네 번째는 이다. 영화에는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로 돌이 등장한다. 이 돌은 무겁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그 돌은 가치를 지닌 수석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선 그저 돌덩이에 불과하다. 이 돌은 누군가에겐 자신을 짓누르는 압박이다. 또 누군가에겐 심각한 무언가로 돌변한다. 이 돌의 의미는 기괴하고 또 괴랄하다. 공교롭게도 이 돌은 기택네 가족이 박사장네 가족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시작이면서도 끝이 된다.
 
영화 '기생충' 스틸. 사진/CJ 엔터테인먼트
 
다섯 번째는 계획이다. 사실상 앞선 네 가지 포인트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없는 자들은 언제나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그것은 갖지 못한 상태에서 그것을 갖기 위해 세우는 예측이다. ‘기생충은 처음 시작과 끝을 그 계획으로 마무리한다. 갖지 못한 그들은 언제나 계획을 통해 살고 계획을 통해 무언가를 꿈꾼다. 하지만 양극화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에서 계획은 언제나 무의미하다. 갖지 못한 계획은 공허함이고 그 공허함은 백일몽처럼 달콤하지만 쓰디 쓴 결과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기생충에선 계획이 갖고 있는 달콤하지만 충격적이게도 쓰라린 결과의 참혹함을 너무도 날이 선 직설 화법으로 언급한다.
 
영화 '기생충' 스틸. 사진/CJ 엔터테인먼트
 
이외에도 기생충에는 수 많은 함의가 담겨져 있다. 블랙 코미디란 장르로 이 영화를 설명하기도 한다. ‘사회파 장르로 불러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스릴러 장르로 해석해도 손색이 없다. 봉준호 감독이 언급한 가족 희비극으로 부르면 가장 적당할 듯싶다. 분명한 것은 이 기생충100개의 관점으로 보면 100개의 해석이 나오게 된다. 100개의 해석을 하면 100개의 메시지를 얻게 된다. 봉준호가 던진 것은 분명 한 가지였지만 스크린은 그것을 수 없이 쪼갰다. 이건 봉준호도 분명 의도한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봉준호가 이것까지 의도했다면 황금종려상이 봉준호를 품기엔 그 그릇이 너무도 작다.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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