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를 축하합니다"…48년 '절친' 허수영·박진수의 마지막 인사
역대급 실적 쓴 뒤 '명예로운 퇴진'…"우리는 경쟁자이자 친구"
2018-12-20 17:35:09 2018-12-20 18:25:02
[뉴스토마토 양지윤·최병호·조승희 기자] "축하드립니다. 이제 짐을 내려놓으셨네~"
 
20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아스토스위트룸. 올해 마지막으로 열리는 한국석유화학협회 이사회 장소에 협회장인 허수영 롯데그룹 화학BU장(부회장)이 들어서자 김창범 한화케미칼 부회장이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냈다. "신문에서 봤습니다"고 운을 뗀 박찬구 금호석유화학그룹 회장 역시 허 부회장을 향해 축하 인사를 전했다.
 
미소를 지으며 감사하다고 화답한 허 부회장은 전날 겪은 이야기를 풀었다. 그는 "외국인과 만나는 자리에서 리타이어(retire·은퇴)를 한다고 했더니, 축하한다고 그래요. 내 발음이 시원찮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헤어질 때 또 그래요. 아, 이건 문화가 틀리구나 싶었죠."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허 부회장을 둘러싸고 있던 다른 사장단들도 밝은 표정으로 "은퇴를 축하한다"는 말을 건냈다.
 
그의 맞은 편에 선 박진수 LG화학 부회장은 화기애애한 자리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박 부회장과 허 부회장은 서울대 화학공학과 70학번 동기로, LG화학과 롯데케미칼은 실적 발표를 할 때마다 1위 자리를 주고받는 '라이벌'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올 연말 인사에서 약속이나 한 듯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게 됐다. 하반기 석유화학 슈퍼사이클(장기호황)이 한풀 꺾이긴 했지만, 양사 모두 지난해와 올해 역대급 실적을 달성하며 명예로운 은퇴를 했다.
 
박진수 LG화학 부회장(왼쪽 네번째부터)과 허수영 롯데그룹 화학BU장(부회장)이 20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국석유화학협회 이사회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시원섭섭합니다." 허 부회장은 은퇴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반반이지만 시원함이 좀 더 크다"며 이 같이 말했다. 42년 10개월. 그가 롯데그룹과 화학산업에 몸 담은 시간이다. 지난 1976년 서울대 학생군사교육단(ROTC) 복무 중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에 합격한 그는 7월1일 입사 직전 딱 하루를 쉬었다. 공백도 없었지만, 재임 기간의 4분의 1인 11년을 CEO로 보냈다. 매년 경영성과를 평가받는 자리에 대한 부담과 긴장감을 엿볼 수 있는 발언이다.
 
평소 공식석상에서 말을 아끼는 박 부회장은 이날 역시 "저 연말까지 현직이에요"라며 짤막하게 답했다. 맞수인 허 부회장에 대한 평가를 묻는 질문에 "50년째 친구인데, 따로 평가할 게 있나요"라며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부회장 승진이 허 부회장보다 5년 빨라 사석에서 종종 "부회장은 아무나 하나"라며 장난섞인 발언을 했던 그지만, 누구보다 속정 깊은 친구다. 허 부회장이 지난해 롯데그룹 경영비리로 재판을 받으며 운신의 폭이 좁아지자 지원사격에 즉각 나섰다. 롯데케미칼에 대한 검찰의 압수수색으로 대외 활동이 여의치 않다고 보고, 박 부회장이 직접 석유화학협회 사장단 회의를 챙긴 것이다. 차기 협회장 추대에 손사래를 치던 그였다. 지난해 열린 석유화학 사장단 골프 모임에 허 부회장이 불참한 것도 박 부회장의 강한 만류가 작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모임에 참석하면 자칫 문제가 된다"며 박 부회장이 호스트를 자처하고 나섰다는 후문이다.
 
업계 고위 관계자는 "둘 중 한 사람이 결정적으로 어려운 순간이 오면 서로 돕기 위해 즉각적으로 나서는 관계"라며 "같은 과 동기라서 다른 사장단에 비해 유대관계가 끈끈하다"고 귀띔했다.
 
허 부회장이 바라보는 박 부회장은 어떤 모습일까. 그도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게 적절치 않다"면서 운을 뗐다. 허 부회장은 "같은 시기 석유화학 분야에 몸 담았지만, 사업 초기에는 겹치는 부분이 없었고, 나프타분해센터를 짓게 되면서 회사끼리 경쟁상대가 된 것"이라며 "항상 박진수 부회장이 앞서가고, 저는 따라가면 됐다. 서로 경쟁자이자 도움을 준 사이"라고 했다. 평소 털털한 성격답게 절친 박 부회장에 대한 신뢰와 친밀함을 드러냈다.
 
이날 두 사람의 '아름다운 퇴장'을 지켜보는 특별한 친구가 있었다. 서울대 화공과 동기이자 석유화학 사장단 멤버인 박준형 효성화학 대표이사다. 지난 2008년 32년간 몸담았던 대림에서 효성으로 옮긴 박 대표는 70학번 중 최장수 CEO로 남게 됐다. 박 대표는 "두 친구가 아직 젊어서 할 일이 많을 것"이라며 "그간 중요한 일을 많이 맡았으니 앞으로도 잘되리라 기대한다"고 응원의 말을 전했다.
 
한편, 허 부회장은 이날을 끝으로 한국석유화학협회장직을 내려놨다. 김교현 롯데케미칼 사장에게 화학BU장 바통을 넘겨주고 상근고문을 맡는다. LG화학은 글로벌 혁신기업 3M 신학철 수석부회장이 박 부회장의 자리를 대신한다. 박 부회장은 LG화학 이사회 의장을 맡으며 후진 양성에 나설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양지윤·최병호·조승희 기자 galileo@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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