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모의세상읽기)그깟 베개 때문에
입력 : 2018-09-14 06:00:00 수정 : 2018-09-14 06:00:00
우리말 맞춤법은 정말 어렵다. 괴발개발처럼 별로 쓸 일이 없어서 익숙해지지 않는 말도 있고 매일 사용하지만 글로 쓸 일이 거의 없어서 헷갈리는 단어도 있다. 배개/배게/베개/베게, 도대체 어떤 게 맞는가? 베개가 맞다. 베개는 덮개나 지우개처럼 동사 뒤에 개를 붙여 만든 단어다. 
 
갓 태어나 며칠이 지나면서부터 베개가 필요하다. 우리 몸은 구조상 맨바닥에 누우면 머리가 뒤로 젖혀져서 불편하기 때문이다. 이불과 요 없이는 잘 수 있어도 베개 없으면 잠들기 어렵다. 하다못해 겉옷이나 두꺼운 책으로 목을 받히든지 자신의 팔이라도 베어야 한다. 팔 저리다. 아내와 연애할 때 봄 햇살을 받으며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웠을 땐 (로맨틱하기는 하지만) 솔직히 불편했고, 어쩌다가 아내의 목을 팔베개로 받혀줄 때는 어떻게 하면 교묘하게 팔을 빼어 낼까를 고민하게 된다. 
 
베개는 목뼈를 편안하게 하는 정도의 높이여야 한다. 그 높이는 베어보면 금방 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는 동안 20~30회 정도 뒤척인다. 따라서 천장을 보고 똑바로 눕든 모로 눕든 어떤 자세를 취해도 편하게 디자인 되어야 한다. 두꺼운 책이 베개로 좋을 턱이 없는 이유다. 어릴 때는 왕겨를 채운 베개를 썼다(자기 베개는 메밀이 채워졌다고 자랑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땐 내가 메밀이 뭔지 몰라서 자랑이 소용 없었다). 탁월한 베개다. 베개가 알아서 가장 편안한 자세를 만들어 준다. 그리고 신체 무게의 10퍼센트를 차지하는 머리의 압력을 골고루 분산시켜 준다. 
 
구석기인들도 베개를 사용했는지, 사용했다면 어떤 베개를 베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남아 있는 베개는 기원 전 7000년 전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이 사용했던 돌베개다. 장준하 선생님을 떠올리게 하는 돌베개가 편할 리 없다. 역사가들은 부자들만 벌레가 귓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목화, 갈대, 밀짚을 채워서 안락한 베개를 만들었다. 부자들은 이미 오리와 거위 가슴 털로 채운 베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중세시대의 유럽은 여러 모로 암흑시대였다. 당시 베개는 유약함의 상징이었다. 영국왕 헨리 8세는 왕과 임신부를 제외한 사람들이 푹신한 베개를 사용하는 것을 금했다. 16세기가 되어서야 다시 푹신한 베개가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곰팡이와 해충 때문에 속을 자주 바꿔야 했다. 유럽인들이 일상적으로 베개를 사용하게 된 것은 산업혁명 이후의 일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민들이 애호하던 오리와 거위털이 산업혁명 후 베갯속으로 최고 인기였다. 거위와 오리가 널려 있었다. 야생 상태로도 많았고 가금류로도 많이 키웠다. 굳이 산업혁명 후만 그런 게 아니고 지금도 그렇다. 찰스 다윈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로 만들어준 책은 <종의 기원>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자연선택이 진화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거창한 것만 연구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지렁이나 산호 같은 주제도 많이 다루었고 <집에서 기르는 동식물의 변이> 같은 책도 썼다. 이 책의 8장에는 '까치오리(Labrador duck, Camptorhynchus labradorius)'가 등장한다. 찰스 다윈은 자신의 집에서 까치오리를 키웠다.
 
까치오리는 19세기에 가장 유명한 집오리 품종이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까치오리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까치오리 털은 이불과 베개의 재료로 너무 좋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베갯속으로 채우기 위해 까치오리를 남획했다. 1871년 캐나다에서 마지막 까치오리가 총에 맞아 죽었다. 4년 후인 1875년 미국 롱아일랜드 섬에서 지구에 남은 마지막 까치오리가 죽었다. 오리털 베개 유행이 시작된 후 불과 수십년 만에 수백만년간 존재하던 까치오리가 멸종한 것이다. 그깟 베개 때문에 말이다.
 
캐나다의 조류학자 글렌 칠튼은 전 세계에 남아있는 55개의 까치오리 박제표본과 9개의 까치오리 알을 자신의 눈으로 보기 위해 5년에 걸쳐 10개 국가 40개 도시의 44개 자연사박물관을 방문했다. 그의 기이한 여행은 우리나라에서도 출판된 <이상한 조류학자의 어쿠스틱 여행기>에 잘 담겨 있다. 나는 2013년 캐나다 몬트리올에 있는 맥길대학교의 레드패스 박물관의 계단참에 까치오리가 아주 허술하게 전시되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지만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글렌 칠튼의 책이 나온 후 박물관이 박제를 수장고로 옮겨버린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쉽게 까치오리를 볼 수 있다. 곶감의 고장 상주의 낙동강생물자원관에는 훌륭한 까치오리 표본이 전시되어 있다. 아름답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penguin1004@m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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