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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보는 일상사-11화)사각지대의 삶, ‘넝마주이’
“내 이름은 넝마주이”
2018-08-27 06:00:00 2018-08-27 06:00:00
우리는 종종 골목길마다 폐지를 실은 리어카를 끄는 어르신들을 마주치게 된다. 심지어 버스, 자동차들이 범람하는 신촌로터리의 큰길을 힘겹게 가로질러가는 폐지리어카를 본 적도 있다. 한국환경공단 자원순환정보시스템의 통계에 따르면, 2018년 7월 기준으로 폐지 1kg당 전국 평균가격은 신문지 97원, 골판지 62.8원이다. 작년 중국이 재활용 쓰레기 수입 중단을 발표한 이래 2018년 1월 각각 148.1원, 136.4원이었던 전국 평균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한 탓이다. 그런데 이 가격은 중간가공업체가 매입하는 가격이고 그 전단계인 고물상의 매입가는 더욱 낮아 1kg당 50원 안팎이라 하니 폭염 속에서 종일 폐지를 줍고 허리 휘게 리어카를 끌어도 노인들이 손에 쥐는 것은 겨우 몇 푼뿐이다.
 
넝마주이 수난사
요즘은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수집한 폐지를 고물상에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빈곤층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모습이 일상적이지만, 예전에는 망태기를 메고 집게를 들어 동네를 돌아다니며 낡고 해진 옷(넝마)이나 폐지, 고철 등 폐품을 모아 파는 ‘넝마주이’가 있었다. 우는 아이에게 엄마가 ‘너 그러면 망태 할아버지가 잡아 간다’라고 겁을 주던 시절, 아이들은 벙거지를 쓰고 망태기를 든 ‘무서운’ 사람의 이미지를 막연히 떠올리기도 했다.
 
넝마주이의 출현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주로 동냥을 하던 거지들이 넝마주이를 해 이들을 ‘양아치’(‘동냥아치’에서 나온 말)라고도 불렀다. 넝마주이들의 고물작업장은 ‘자작’과 ‘사설막’으로 구분되었는데, ‘자작’은 혼자 또는 가족단위로 막을 만들고 폐품을 수집하는 것이고 ‘사설막’은 거지왕초인 ‘조마리’가 대원들을 거느리고 관리하는 막을 뜻했다. 조마리는 넝마와 고물을 수거해오는 대원들에게 이용료를 거둬들였고 작업량에 따라 급료를 지불하기도 했으나 이 과정에서 공공연한 착취와 수탈이 이뤄졌다.
 
넝마주이들은 한국전쟁 직후 국가에 의해 ‘대한산업’이라는 이름으로 조직되었다. 1962년에는 박정희 정권이 ‘근로재건대’라는 명칭으로 넝마주이들을 경찰의 관리·감독 하에 두게 된다. 넝마주이들은 관할시청에 등록해 증명을 받고 지정된 복장과 명찰을 달아 지정된 구역 내에서만 일해야 했는데, 이러한 근로재건대는 전국에 각 경찰서별로 군대식 체계에 따라 조직되어 있었다. 1979년 6월 박정희의 명령에 따라 근로재건대는 부랑아, 넝마주이, 구두닦이 등 도시빈민들을 모아 만든 자활근로대로 통합되어 그해 7월 발족식을 하게 된다.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은 전장의 비장함과 피난민의 고단함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6.25전쟁 관련 사진 기록을 공개했다. 사진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전쟁고아들(1951. 12. 22, 부산). 사진/뉴시스
 
자활근로대라는 미명 아래 넝마주이들은 사실 국가공권력에 의해 집단적으로 수용되고 강제노역을 당했다. 경찰은 자활근로대 대원들이 모아온 고물을 사서 외부에 팔아주는 역할을 했으나, ‘도둑놈강조주간(일제단속기간)’에는 조마리(왕초)와 흥정을 해서 넝마주이들을 도둑으로 몰아 몇 명씩 잡아가기도 했다. 넝마주이들은 이와 같이 경찰에 의해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대중의 기피 대상이 되었는데, 이는 6·25 전쟁고아들이 거지, 도둑, 넝마주이로 살아야 했던 역사적 상황으로 인해 대중의 뇌리 속에 남은 부정적 인상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자활근로대로 분리된 ‘넝마주이마을’의 사람들은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 당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거주 지역 바깥으로 나오는 것도 금지 당했다.
 
야 낙보야 짭새 오신다
 
저쪽에서 순철이가 알려준다
쳐들었던 집게 내리고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싸리 추렁 헐렁하게 메고 나섰다
집게 휘둘러
천하에 내린 내 물건들 점고하신다
 
내 이름은 넝마주이
내 이름은 써라이
내 이름은 시라이 살쾡이
호적이름 낙보 잊은 지 오래
 
그러나 순철이만 만나면 내 이름 살아난다
 
남의 집 옷 걷기
슬쩍 들어가
빨랫줄 몇가지 걷어오기
 
순철이 만나야 내 이름이 살아난다
 
야 낙보야
우리 언제 이놈의 써라이막 면하냐
왕초 그 자식 못 벗어나면
너와 나
이놈의 영등포 떠날 수 없다
< … >
(‘넝마주이 짝궁’, 17권)
 
궁핍했던 지난날을 풍자와 해학으로 슬기롭게 살고간 각설이들의 고난과 애환을 뒤돌아보는 음성 품바축제. 사진/뉴시스
 
영동5교 밑 마지막 넝마공동체의 기억
1981년 3월 서울시는 환경미화 명목으로 넝마주이를 비롯한 자활근로대 약 1,000명을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정보사 뒷산으로 집단 이주시킨다. 같은 해 12월에는 이들을 다시 서울시 강남구 포이동 266번지(재건마을)를 비롯한 10개 지역으로 분산 이주시켰다. 또다시 공권력에 의한 강제 이주당하고 착취를 벗어나지 못하던 넝마주이들의 삶에 변화를 일으킨 것은 1986년 윤팔병을 중심으로 조직된 ‘넝마공동체’이다. 헌책방을 운영하던 윤팔병 씨는 헌책을 모으려고 넝마주이 막을 자주 방문하다가 넝마주이들에 대한 착취를 알게 되고 이를 막기 위해 공동체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는 결국, 재건대 간부 출신으로 사설막을 운영하던 문영삼을 3년간 설득해 그의 사설막을 공동체 막사로 개조하고 공동체를 설립하게 된다.
 
공동체 대표 문영삼, 대학생 출신으로 넝마주이를 하던 송경상 총무와 주위의 넝마주이들이 윤팔병과 뜻을 함께 해 그가 헌책을 팔아 모은 돈 1,000만원으로 1986년 여름 넝마공동체의 제1작업장을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만들었다. 1987년 3월에는 강남구 대치동 양재천 영동5교 아래에 제2작업장을 세웠다. 제1작업장은 그러나 1988년 건물 신축을 이유로 폐쇄당한다. 넝마공동체는 1999년 포이동의 시유지 1000평을 점거해 작업장으로 사용했지만 2005년에 철거되었다. 최후까지 남아 있던 영동5교 밑 공동체 작업장은 지난한 싸움 끝에 2012년 11월 결국 강제 철거된다.
 
공동체 설립을 주도했던 윤팔병은 그 자신이 어릴 때부터 구두닦이, 신문팔이, 앵벌이, 노점상 등 갖가지 일을 전전하며 최하층의 삶을 살아왔고, 주거 부정에 직업 없이 우범지대를 배회하는 부랑아라는 이유로 방범기간에 단골로 잡혀가는 대상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농부철학자’로 유명한 윤구병 교수의 형이기도 하다. 윤구병 교수는 충북대 철학과 교수직을 그만두고 낙향해 농사를 지으면서 대안교육을 위한 변산공동체를 이끄는 인물이다. 이들 구병, 팔병의 9형제 중 6명이 한국전쟁 중에 희생을 당한 비운의 가족이기도 하다.
 
윤일병
윤이병
윤삼병
< … >
 
1950년 10월 한국전쟁 와중
이 형제 중 넷은 좌익으로 처형되었다
둘은 실종되었다
 
윤칠병* (*본명은 윤인병 – 필자)
그는 고문후유증을 앓다가 끝내 자살했다
 
윤팔병
차라리 넝마주이가 되어버렸다
구두닦이
뚜쟁이가 되어버렸다
넝마두레 만들어
영동교 다리 밑에서
고물을 모아다가
넝마거지들과 함께 살았다
 
마누라도 생겼다
마누라 속옷도 넝마였다
제일 소중한 사람에게
주워온 넝마 입히는 지아비의 슬픔 왜 없겠는가
 
그의 아우
윤구병
어찌어찌하다 그 사람 하나가 대학 철학과에 들어가
< … >
지방대학 철학 교수가 되었다
 
언제나 가슴속 불기둥이 있었다
오지랖 넓은 날들 저물어
밤이면 혼자 울었다
 
다 그만 두고
두메산골 고구마밭으로 가버렸다
밤 풀밭에서 실컷 모기 물려 가려웠다
 
윤씨 구형제
그들의 시대에
다른 사람들도 죽어갔다 또한 살아남았다
(‘그들 구형제’, 21권)
 
윤팔병의 넝마공동체는 ‘더불어 사는 세상, 나눔과 섬김의 세상’을 지향하면서 국가와 사회가 버리고 착취했던 사람들이 실제로 ‘자활’할 수 있도록 도왔던 자립공동체였다. 모든 이익금을 공동체 성원들이 나누었고,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조건 없이 6개월 동안 숙식을 제공하며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 IMF때 찾아온 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였으며, 외국인노동자들과 대북지원단체에 헌옷을 기증하기도 했다. 모든 사람들이 소외받지 않고 의식주와 교육, 의료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꿈꾸던 진정한 자활공동체는 그러나 끝내 자활을 위한 터전을 얻지 못한 채 2012년 양재천 영동5교 다리 밑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포이동 266번지
넝마공동체는 1999년 포이동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공터인 시유지에서 작업장을 운영하다 2005년 11월 말에 철거당했지만, 포이동 266번지에는 1981년 12월 군사정권에 의해 강제 이주되어 살아온 104세대도 있었다. 자발적 이주자인 넝마공동체 뿐만 아니라 강제 이주 당했던 자활근로대 넝마주이들 역시 철거 대상이 된다. 1989년 자활근로대의 해체 통보 이후 여전히 집단거주지에서 생활해 온 자활근로대 대원들과 그 가족들은 불법 점유자로 몰려 이후 눈덩이처럼 불어난 토지변상금을 강요받았다. 게다가 서울시가 1989년에 실시한 구획정리에 따라 당시 200-1번지가 266번지로 바뀌었지만, 포이동 주민들은 주민등록상 266번지를 주소지로 받지 못한 채 공식적인 ‘국민’에서 배제된 것이다.
 
국가 폭력에 의해 강제로 이주당하고 ‘도시 미관’을 위해 감시와 통제를 받아야 했던 사람들,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에 내몰렸으나 이를 개척해 살던 사람들, 서울시 체비지(替費地)인 포이동 266번지 주민들은 이제 ‘토지 불법 점유’에 대한 벌금을 물어야 하는, 주민등록상의 주소지는 없으나 군대는 가야 하고 세금은 내야 하는 이상한 국민이 된 것이다. 더 이상 갈 곳 없이 몰린 상황에서 2004년 6월~7월 한 달 간격으로 김천복-임정숙 부부가 자살했을 때, 그들의 두 아들은 군복무 중이었다. 국가가 이 부부에게 강요했던 토지변상금은 4,668만원. 이 중 원금은 2,219만원이고 체납액에 대한 연체 이자가 2,449만원이었다. 국가가 돌보지 않는 삶, 사회가 배제한 사각지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오늘도 하루를 성실히 살고 있다.
 
1981년 서울 종로구 행촌동. 산지가 많은 서울에서는 산비탈에 주거지역이 많이 형성됐다. 이를 ‘달동네’라고 불렀다. 사진/뉴시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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