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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과 남북경협)대기업인 최초 소련 방문···시베리아 개발 모색
(4)북방경제권-남북경협의 연동 구상
2018-08-11 06:00:00 2018-08-11 06:00:00
[뉴스토마토 채명석 기자] 1980년대 중반 이후 동아시아 국제 환경은 격변의 모습을 띠었다. 1970년대 들어 중국이 국제무대에 등장한 것에 이어 1985년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소련이 대외경협을 통한 시베리아 개발에 적극 나선 것이다. 본래 시베리아 자원 개발은 일본과 소련이 1956년 관계 정상화후 1960년대부터 주요한 협의 이슈였지만 ‘북방 4도’ 등 정치적 분쟁에 가로막힌 상태였다. 1980년대 후반 들어 국제 유가 하락세 때문에 일본이 소극적으로 나오자, 소련은 북한과의 우호적 관계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한국에서도 전두환 정부 말기에 시베리아 자원 개발에 참여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시됐다. 시베리아 진출은 무엇보다 중동 건설 붐을 대체하여 건설업을 활성화시키고 자원 수입원을 확대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이미 전두환 정부는 국제 환경의 영향에 민감하게 대응하면서 북한과 적극 대화하고 협상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다.
 
한소 경제 교류와 한국 기업의 시베리아 진출은 소련의 자원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정치적 우려’ 때문에 소련과의 단독 경협을 꺼리던 미국과 일본이 유도한 측면도 있었다. 동아시아 냉전구도가 일정하게 흔들리면서 한국이 공산권(소련)과 서구 자본(미국·일본)의 중간 지점에 서는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88올림픽은 한소 교류가 본격화하는 계기였다. 소련은 경협 차원에서 호텔 합작부터 섬유 공장, 석탄, 가스, 목재 자원 개발 등 한국기업 투자를 위해 “무엇이든지 들어줄 것”같이 적극적이었다. 서울~모스크바간 직항로 개설, 서울과 모스크바 무역사무소의 영사업무 취급 합의 등 한소 관계 진척은 중국이 불만을 표시할 정도로 한중 관계 진척보다 훨씬 빨랐다. 여기에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조우하면서 한국과 소련 정부 간에 경협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유럽 진출에 앞장서면서 공산권 및 시베리아 개발에 관심을 표명했던 대우를 제외하면 당시 대부분의 한국 기업들은 수동적으로 관망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소비재 업종이 없던 현대그룹은 다른 재벌보다 공산권 진출이 늦었지만,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국제 환경 변화를 포착하고 우호적 한소관계와 한국 기업의 시베리아 자원개발 참여가 한국 경제가 재도약을 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강조했다.
 
이후 아산의 적극적 대소 경제외교는 양국 간의 정체된 논의를 풀어가는 실마리가 되었다. 1988년 9월, 아산은 소련과학아카데미 극동연구소장 미하일 타타렌코 박사 일행의 예방을 받았다. 이어 10월에 현대그룹을 방문한 소련상공회의소 대표단 블라디미르 골라노프 부회장은 한국 기업의 시베리아 개발 참여를 적극 권했다. 그 후 아산은 5공 청문회가 진행 중인 1988년 11월말 일본을 방문해 이시카와 일본상공회의소 회장, 미무라 미쓰이 상사 회장 등과 컨소시엄 의사를 타진하고 12월에 미국을 방문해 파슨즈, 벡텔 등 세계 3대 건설업체 회장과 만나 시베리아 공동 진출안을 협의했다. 
 
1989년 1월7일 국내 대기업인으로는 최초로 소련을 방문한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수도 모스크바시에 도착해 걸어가고 있다. 사진/현대종합상사 40년 발자취
 
1989년 1월6일, 아산은 한국 대기업인으로서는 최초로 소련을 방문했다. 소련 무임소 장관 겸 상공회의소회장이자 시베리아개발위원장(장관급)인 초청자 말케비치의 일정 주선으로 소련 정부 관계자들과 회담을 가졌다. 아산은 석유, 가스 등 대형 프로젝트는 단독 투자보다 각국 기업의 공동 투자가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말케비치는 필요한 경우 첨단 기술도 제공하겠다면서 한국 기업의 시베리아 개발 참여를 독려했다.
 
1989년 7월24일, 아산은 38명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다시 소련을 방문, 한소경제협회(1989년 7월18일 발족) 회장으로서 모스크바에서 7월31일 소련상공회의소와 창립총회를 열고 최초로 양국 경제인들 간에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그는 한국의 소련 진출에 대한 미국의 긍정적 판단을 전제로, 투자 위험 분산을 위해 100만 달러 규모 이하의 석탄, 목재 산업 분야 등에서 미국 등과의 합작 투자가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미국·일본 대기업과 컨소시엄 형태였지만, 아산은 일찍부터 구상해왔던 공산권 경협을 시베리아 자원 개발을 통한 ‘북방 경제권’ 모델로 구체화했다. 현대그룹에서 구체적인 업무 추진은 현대건설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현대건설이 기반을 잡으면 원유·가스 등의 수송으로 해운·조선이 추진력을 얻고, 플랜트 사업이 활기를 찾는 연쇄 파급 효과를 기대한 것이다. 이는 이후 그의 남북경협 추진 과정에서도 발견되는 패턴이었다.
 
해외 언론은 1989~1990년에 여섯 차례나 소련을 방문한 아산을 ‘거물급 비공식’ 외교관으로 평가했다. 아산이 구상한 북방경제권의 중심은 한반도였다. 때문에 미개발자원이 풍부하고 한국과 가까운 극동 연해주와 시베리아 진출에 초점을 뒀다. 현대그룹은 석유가스개발, 임산자원개발, 지상석탄광개발, 수산업 등 북방 자원개발에 초점을 두고 1988년 11월 말 선박 수리, 1989년부터 선박 건조 수주도 적극 추진했다. 소련과 중국에서 자원 조달, 생산기지 이전과 현지 노동력 사용, 가스관이나 송유관으로 연결된 남-북을 축으로 한 동북아 경제공동체 건설을 구상한 것이다.
 
이를 위해 남북경협은 필수적이었다. 소련도 북한의 저임금 노동력을 사용하라고 강권하는 등 경협에 우호적 환경을 제공했다. 이런 배경에서 소련 정부나 언론은 소련을 최초로 방문하고 2주 후에 이뤄진 아산의 첫 방북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시베리아 개발을 위해 한국 자본과 북한의 노동 추자를 강조했다. 아산의 북방경제권 구상이 남북경협과 연동된 것이다.
(자료: 실리적 남북경협 - 아산의 탈이념적 구상과 실행, 정태헌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채명석 기자 oricms@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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