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에 절은 조종사들)고무줄 비행시간·야간비행에 졸음운항 '다반사'
LA등 장거리노선, 수면질 나빠지며 반응속도도 급속 악화
야간·중장거리 조종사 52% 수면중무호흡증…LA>방콕>런던 순 무호흡지수 높아
2018-03-12 06:00:00 2018-03-12 06:00:00
[뉴스토마토 구태우 기자] 성탄절을 하루 앞둔 2017년 12월24일 짙은 안개가 인천공항을 덮쳤다. 성탄절을 외국에서 보내려던 승객은 속수무책으로 기내에서 대기했다. 이륙을 기다리는 승객의 초조한 마음을 모르는지 이날 안개는 7시간 가량 지속됐다. 답답한 건 승객 만이 아니었다. 대한항공의 기장 이정식(가명)씨는 조종석에 앉아 초조한 마음으로 이륙 허가를 기다렸다. 이륙이 더 지연될 경우 조종사를 바꿔야 했다. 장시간 기내에서 대기하면서 피로가 누적돼 안전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이날 밤 9시쯤 안개가 걷히고 이륙허가가 떨어졌다. 비행기들이 삼삼오오 이륙했다. 기장의 항공기로 무전이 날아들었다. 회사 관리자는 "이륙하실 겁니까. 기장님께서 결정하십시오"라고 물었다. 조종사를 바꾸려면 바꾸라는 얘기였다. 결국 이 기장은 본인이 몰기로 결정했다. 이날 6시간 비행한 뒤 새벽 늦게 방콕에 도착했다. 기장은 수속을 마치고 호텔에서 쓰러졌다. 안개로 대기시간이 길었고, 야간비행의 피로까지 겹쳐 파김치가 됐다. 이튿날 새벽 피곤한 상태로 비행기를 몰고 인천공항으로 들어왔다. 이날 인천공항을 떠날 예정이었던 항공기 247편, 도착 예정 42편 등 총 289편이 지연됐다. 2017년의 성탄절 이브, 많은 조종사와 승무원들이 피곤에 절었다. 
 
(이미지제작=뉴스토마토)
 
<뉴스토마토>가 11일 입수한 국토부의 '한국형 피로관리시스템(FRMS) 구축 연구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국적 비행을 하는 조종사가 상당한 피로에 시달려 항공안전이 우려되고 있다. 조종사 2명 중 1명은 수면무호흡증을 앓았고, 자신도 모르게 조는 '깜짝 졸음' 증상을 겪었다. 이 같은 증상은 수면의 질을 떨어뜨려 피로를 가중시킨다. 
 
보고서는 "수면무호흡증은 주간 시간에 졸립게 해 각성상태를 유지하기 힘들게 된다"며 "안전운항을 위협하는 대표적 질환"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는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등 국적항공사 조종사 51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수면다원검사(대상 21명) 등을 통해 진행됐다.
 
연구 결과 노선별로 로스앤젤레스(LA) 노선의 피로가 극심했다. LA까지 비행시간은 13시간30분, 시차는 17시간이다. 영국 런던(11시간35분·시차 8시간), 태국 방콕(6시간 5분·시차 2시간), 중국 산야(5시간 15분·시차 1시간) 순으로 피로도가 높았다. 수면의 질은 현지에 도착한 뒤부터 떨어졌다. LA에 도착한 첫날 수면시간은 전날(441분)보다 129분 떨어진 312분을 기록했다.
 
수면의 효율성도 운항 전날 83.06%에서 LA 도착 첫날 76%로 떨어졌다. 수면의 질이 떨어진 만큼 반응속도도 나빠졌다. 운항 전날 반응속도는 459.16ms였는데, 도착 후 514.58ms까지 상승해 반응속도가 느려졌다. 늦은 반응의 빈도 또한 2배 이상 늘었다. 인천공항에서 LA 출발 전은 늦은 반응 빈도가 5.08회였는데, LA공항에서 출발 전은 12.65회까지 늘었다. 조사 대상 노선인 런던, 방콕, 몰디브, 산야 등에서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보고서는 "피로, 시차변화 등으로 첫날밤 수면이 원할하지 않았다"며 "야간, 장거리 비행이 피로에 영향을 미쳤고, 하루밤의 수면으로 피로가 해소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조종사는 방콕, 런던, LA에서 하루 또는 이틀만 쉬고, 다음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번 연구에서 피로도가 높은 야간·중장거리 노선의 조종사 21명을 대상으로 수면다원검사가 진행됐다. 그 결과 LA(31.8)-방콕(15.7)-런던(13.8) 순으로 수면 중 무호흡지수(시간당 무호흡 발생 횟수)가 높았다. 실험자 중 52.3%가 수면무호흡증을 알았다. 이중 19%는 시간당 30회 이상 나타났다. 30회를 넘기면 낮 동안 졸립고, 잠을 잔 것 같지 않다. 조종사의 평균 수면시간은 6시간18분으로 일반 성인의 권장 수면시간인 7시간에 못 미쳤다. 항공기 운항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해 운항 중 각성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수면량과 수면의 질 모두 낮았다. 항공기 사고가 대형참사로 이어지는 점을 고려할 때 조종사의 건강 뿐 아니라 승객의 안전까지 우려되는 대목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2009년 영국의 'GO항공사' 1002편이 목적지 공항을 지나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조종사 2명 모두 잠든 게 사고 원인이었다. 조사 결과 조종사 두명 모두 수면무호흡증을 앓았다. 이 같은 일은 비단 영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조종사 노조에 따르면 조종사들은 피로로 랜딩기어(착륙장치)가 내려지는 소리에 잠이 깨는 경험을 한 경우도 있다. 관제탑에서 여러번 불러야 잠에서 깨 대답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활주로에서 우회전을 했어야 하는데, 몸이 반대방향으로 움직인 경험도 있다고 노조 관계자는 설명했다. 한 조종사는 "비행 중 졸음이 밀려오는데 (지난해 7월) 경부고속도로 졸음운전 사고를 보면서 뜨끔했다"고 토로했다.
 
내국인 조종사의 한달 비행시간은 최대 100시간에 달하고, 중장거리 노선을 비행할 때는 최대 비행시간 경계에 육박한다. 야간비행과 잦은 이착륙, 시차는 조종사의 피로를 가중시킨다. 휴식시간은 충분하지 못해 조종자들은 만성 피로 상태로 비행기를 운항하는 셈이다. 보고서는 "수면부족이 장기화되면 초기는 피로를 느끼나 나중은 각성도와 업무능력이 저하돼도 자신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며 "잠에 대한 압박이 증가해 잠을 통제하지 못하는 깜빡수면 현상이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구태우 기자 goodtw@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0/300

뉴스리듬

    이 시간 주요 뉴스

      함께 볼만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