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 들킬뻔 한 성북구 ‘얼굴 없는 천사’
8년간 쌀 2400포대 기부…주인공 '엄포'에 숨바꼭질 중단
입력 : 2018-01-12 06:00:00 수정 : 2018-01-12 06:00:00
[뉴스토마토 신태현 기자] 체감 온도가 영하 16도까지 떨어진 11일 새벽 6시30분, 월곡2동 주민센터 공무원들은 취약계층 보호를 상징하는 노란 우산을 건물 밖에 매다는 등 신년인사회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성북구는 이날 오전 7시20분부터 서울 성북구 월곡2동 주민센터에서 각종 기부 행사를 핵심으로 한 신년인사회를 열었다. 2011년부터 이맘때면 익명의 기부자가 어김없이 20kg짜리 쌀 300포대를 보내기 때문에, 쌀 포대를 수령하는 일이 신년인사회 행사의 일부가 된 지는 오래됐다.
 
이날까지 ‘얼굴 없는 천사’가 보낸 쌀은 2400포대로 시중가격으로 1억2000만원에 이른다. 기부 대상 주민들은 복지센터 등에서 받는 쌀이나 물건보다 익명의 기부자가 꾸준히 주는 쌀을 덜 부담스러워하고 더 좋아한다고 성북구 관계자는 설명했다.
 
8년 동안 주민센터와 성북구는 기부자와 일종의 숨바꼭질을 해왔다. 초반 몇 년간에는 기부자 본인이 직접 주민센터에 전화해 기부를 하겠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단체를 통해 기부 절차를 밟는 치밀함을 보였다. 그래도 주민센터는 포기하지 않고 기부자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과정에서 직접 통화하며 여러 가지 정보를 알아냈다.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은 아버지에서 비롯됐다. 기부자의 아버지는 월곡동에서 사업하면서 지역에 애착감이 생겼고, 아들에게 “나눌 게 있으면 월곡동에서 나누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도, 기부가 아버지의 뜻이라 자신의 이름을 드러낼 수 없다는 생각이다. 주민센터 관계자에 따르면, 기부자의 아버지는 현재 경북에서 정미소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센터와 성북구는 더 이상의 추적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기부자는 자신이 드러나면 더 이상 기부를 안하겠다고 완강한 입장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날 신년인사회에서 김영배 성북구청장은 “‘얼굴 없는 천사’가 대강 어디 사는지 전해들었지만 이름 드러낼 거면 아예 기부를 안하겠다고 해 더 이상 밝히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8년째 계속되는 익명 기부에 감동한 지역 주민들은 봉사에 동참하기도 한다. 작게는 주민센터로 온 쌀 포대를 나르는 사람부터 크게는 물품을 기부하는 사람도 있다.
 
이날에는 기부자 명예의 전당 등재 행사가 있었다. 자신들도 지원을 받는 처지인 상월곡실버센터 회원들은 한 사람당 1만원씩 모아 성금 100만원을 기부했다. 월곡2동의 하공용 통장은 쌀 10kg 100포와 라면 50박스를 내놓았다.
 
동아에코빌의 동행공방을 운영하는 안덕준 입주자 대표는 공방에서 만든 좌탁 11개, 도마 11개를 들고 왔다. 1월 11일에 좌탁 11개, 도마 11개가 있어 럭키 세븐, 즉 새해의 행운을 기원하는 의미다. 좌탁과 도마는 자그마해 어르신들이 들기 쉽게 돼 있다.
 
안 대표와 센터 직원 등은 쌀 포대를 구르마에 싣고 좌탁과 도마를 들고 반지하 빌라에 사는 독거 노인을 찾아갔다. 결혼하지 않고 91세까지 혼자 살고 있다는 할머니 A씨는 쌀과 탁자·도마를 보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반색했다. A씨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경전이나 각종 서적을 필사하고 있었다. 안 대표는 "이 탁자는 식사뿐 아니라 책을 놓고 보거나 옮겨적기도 편하다"고 말했고, A씨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김영배 성북구청장이 11일 오전 서울 성북구 월곡2동 주민센터에서 기부받은 쌀을 나르고 있다. 사진/성북구
 
신태현 기자 htenglis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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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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