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사람)“한국 북디자인에 담긴 ‘배려’, 인상 깊었어요”
존 그레이·데이비드 피어슨·석윤이의 '한-영 북디자인 세미나'
입력 : 2017-09-14 17:59:47 수정 : 2017-09-20 08:42:06
[뉴스토마토 권익도기자] “한국 북디자이너들은 책을 독자들이 소유할 만한 아름다운 ‘선물’처럼 만드는 것 같습니다. 영국에는 없는 정성, 배려의 가치들이 보였어요.”
 
지난 13일 파주 출판도시문화재단에서는 ‘12회 파주북시티 국제출판포럼’의 일환으로 ‘한영 북디자인 세미나’가 열렸다.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북디자이너 존 그레이와 데이비드 피어슨, 한국의 석윤이 미메시스 출판사 디자인 팀장이 참여한 이 자리에선 양국의 디자인 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다채로운 의견들이 교환됐다.
 
오진경 PaTI 출판디자인연구소 소장의 사회로 진행된 세미나는 세 디자이너의 삶과 그간의 작업을 살펴보는 순서로 시작했다. 북디자인업체 그레이318 대표로 세계적인 출판사의 책 표지 작업을 하고 있는 그레이와 미 최대 출판사 펭귄북스의 유명 시리즈물들을 작업해 온 피어슨, 그리고 국내 출판사 열린책들의 철학서나 추리소설 등을 디자인해 온 석 팀장의 이야기가 전해졌다.
 
세 사람의 이야기 중심에는 북디자인에 대한 애정과 각자 만의 철학이 있었다. 책 원고를 갈기갈기 찢거나 실제 물건을 바구니에 담으며 아이디어를 구상했다는 그레이의 작업기나 펭귄북스에서 심플하면서 명확하게 작업을 하는 중요성을 배웠다는 피어슨의 경험담, 1980년대부터 오늘날 한국의 북디자인 흐름을 짚어준 석 팀장의 이야기에 참석자들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후 이어진 대담회에선 양국 북디자인의 세계를 이해해볼 수 있는 심도 깊은 질문들도 이어졌다. 그레이는 한국과 영국 북디자인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 “한국의 교보문고를 가보고 크게 놀랐다”며 “영국보다 독창적인 표지들이 눈에 띄었다”고 말했다.
 
“서점에 가서 서너 시간 정도 책과 놀았어요. 눈으로 보기도 하고 종이의 질감을 느껴보면서요. 최근 영국에선 필기체의 타이포그래피를 전면에 세운 일률적인 디자인이 유행하고 있어요. 그건 오로지 북디자인을 판매의 관점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죠. 반대로 한국에는 새롭고 다양한 표지들이 많더군요. 저는 독자들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디자이너들의 정성이 보였습니다.”
 
그레이의 말에 피어슨도 동의하며 거들었다. “저 역시 놀랐어요. 평상시에 북디자인이 뭔가를 가르치거나 고압적인 느낌을 준다면 그건 재앙에 가깝다고 생각했거든요. 한국 책들은 정반대에 가까웠어요. 표지에서 독자들에 대한 차분한 배려가 느껴졌어요.”
 
영국 디자이너들의 칭찬이 이어지자 석 팀장은 “국내 출판사들이 제본 기술이나 마감에 공을 들이는 경우가 많은데 아마 그런 면에서 두 분이 그렇게 느낀 게 아닐까 생각한다”며 “오히려 저는 반대 입장에서 다양한 영국 서적들을 접하며 디자인 욕구가 높은 나라라는 생각을 하곤한다”고 말했다.
 
종이책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는 오늘날 상황에선 디자이너들 모두 “변화에 적응해 가야 한다”는 뜻을 공유하기도 했다.
 
“온라인에서도 책이 유통되는 상황에서 우린 아주 작은 섬네일 이미지까지 신경써야 합니다. 어느 플랫폼에나 적용될 수 있도록 북디자인이 진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하고 있죠.(존 그레이)”
 
이날 세미나에는 북디자인에 대해 평소 관심이 높은 학생들이나 현직 북디자이너들도 많이 참석해 디자이너로서의 고충을 그들과 나누기도 했다. 한 학생은 “디자이너 지망생인데 항상 준비가 된 건가하는 의문이 든다”고 고민을 털어놓자 그레이와 피어슨은 자기비하식 유머로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했다.
 
“저도 작업물을 받으면 공포에 시달리거나 스트레스를 받아요. 나의 밑천이 드러나겠다는 부정적 생각도 하고요. 자존감은 땅바닥을 기고요.(존 그레이)” (참석자들 웃음)
 
“하지만 그런 공포 때문에 더욱 최선을 다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한 작업물을 컴퓨터 폴더 상에서 보면 절반은 맘에 안드는 때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 자체가 창조의 과정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데이비드 피어슨)”
 
마지막에 오 소장이 “북디자인은 각자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묻자 세 사람은 서로 각기 다른 답으로 행사를 마무리했다.
 
“북디자인은 협업이 필요한 일입니다. 특히 작가들과 함께 하는 일이죠. 어떻게 보면 책을 쓴다는 행위는 위대한 일인데 그 노력의 일부가 될 수 있어 기쁩니다. 특히 표지를 통해 책 내용을 해석했다는 반응을 들었을 때 정말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껴요.(존 그레이)”
 
“책은 현실보다 더 나은 세상을 보여준다 생각합니다. 현실 속에서 우린 항상 뭔가에 쫓겨 달리는 기분을 겪죠. 잠도 못잘 때도 있고요. 마하트마 간디는 ‘인생에는 서두르는 것 말고도 더 많은 것이 있다’고 했죠. 맞습니다. 제게 있어 책, 디자인은 무엇보다도 차분함을 제공해주는 요소입니다.(데이비드 피어슨)”
 
“평소 컴퓨터 모니터보다 종이를 보길 좋아합니다. 그래서 북디자인도 하게 됐거든요. 나에 의해 포장된 책이 세상에 나간다는 것, 그것 자체가 제겐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석윤이 팀장)”
 
지난 13일 파주 출판도시문화재단에서 ‘12회 파주북시티 국제출판포럼’의 일환으로 열린 ‘한영 북디자인 세미나’. 사진/권익도 기자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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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익도

자유롭게 방랑하는 공간. 문화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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