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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곤의 분석과 전망)베를린에서 느낀 중력과 책임윤리
2017-07-17 06:00:00 2017-07-17 06:00:00
잘 된 일이다. 국민의당을 필두로 해서 자유한국당까지 모든 야당들이 추경 심의에 착수하면서 국회가 정상화됐다. 잘 한 일이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야당 대표를 만나 물꼬를 트고, 여당 원내대표와 대통령의 만남 이후 물의를 빚던 장관 후보자가 물러났다.
 
물론 이제 물꼬를 텄을 뿐이다. 추가경정예산 심의에선 항목별 증액과 삭감 사이에서 줄다리기도 진행될 것이다. 정부조직법 협상에선 물 관리 주체, 해양경찰청의 위상 등을 두고 벌써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여야가 ‘내용’을 갖고 줄다리기를 벌이는 것은 장려할 일이다.
 
추경 내용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황당한 항목도 눈에 띄는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소방청과 해경을 행정안전부 산하 외청으로 둬야한다는 국민의당 주장이나 물관리는 국토부가 계속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자유한국당 이야기가 꼭 나쁜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내용’을 가지고 치열하게 논쟁하면 될 일이다.
 
내주로 예정된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5당 대표의 회동 역시 꼭 덕담만 오갈 필요는 없다. 청와대 녹지원의 신록이 볼만하겠지만 마음에도 없이 치켜세우는 이야기만 주고 받는 것 보단 차라리 치열한 공방도 가미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인수위도 없이 출범한 정부’라지만 인수위가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간판을 내릴 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실제로 인수위 맞잡이던 국정기획자문위도 활동을 종료했다.
 
이제 모두, 특히 여권은 땅에 발을 디딜 때가 됐다. 특히 청와대는 이미 ‘중력’을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1일 G20순방 이후 첫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우리가 뼈저리게 느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한반도의 문제인데도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해결할 힘이 있지 않고, 우리에게 합의를 끌어낼 힘도 없다는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미국과 독일을 연달아 방문해서 문 대통령은 무엇을 느꼈을까? 아마 이런 식 일거다. ‘선방’했다던 안팎의 평가를 받았던 한미정상회담 이후 미국은 ‘합의’하지 않았던 한미FTA재협상 카드를 꺼냈다. 중국은 시종일관 우리에게 싸늘한 태도를 취했다. 일본? 말한 것도 없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말과 표정이야 따듯했지만, 우리가 그들에 대해 그러하듯 그들에게 우리도 강 건너 불구경 수준이다.
 
대외 현실의 싸늘함에 대한 냉정한 인식의 연장선에서 국내 정국을 돌아봤다면? 40%에 불과한 여당 의석수가 가장 먼저 떠올랐을 것이다. 꽉 막힌 인사 문제에 대해선 야당에 대한 야속함과 각 인물의 흠결에 대한 답답함이 교차했을 것이다. 80%에 육박한 채로 떨어질 줄 모르는 지지율에 안도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대통령은 책임 윤리의 무게를 깊이 인식했을 것이다.
 
막스 베버가 말한 바로 그 책임 윤리. 베버에 따르면 정치인을 밀어 올리는 동력은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로 나뉜다. 신념윤리는 자기 신념에 끝까지 충실한 태도고, 책임윤리는 신념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결과를 예측하고 감당하는 자세다. 베버는 좋은 정치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최종적 자질을 책임 윤리 위에 놓는다.
 
돌아 볼 일이다. 지난 일주일 여간 누가 책임윤리에 충실했는지, 누가 신념윤리란 명분에 도취되어 적대를 강화하고 책임 윤리의 구현을 방해했는지 말이다.
 
책임윤리에 충실하고 성과를 구현하는 정치인들에게 더 많은 보상이 돌아가야 한다. 물론 신념윤리는 부인할 수도, 부인될 수도 없는 덕목이다. 하지만 책임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신념 윤리에 매몰되어 정국을 오도하는 사람들에겐 ‘책임’을 물어야 한다. 책임윤리에 충실한 정치가 힘을 얻고 그에 앞장서는 정치인들이 더 많은 힘을 갖게 하는 것은 유권자의 ‘책임’이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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