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73화)조선과 더불어 산 청춘, 이소가야 스에지
“겉은 일본인 노동자 / 속은 조선민족해방 지지자가 되다”
입력 : 2017-07-10 08:00:00 수정 : 2017-07-10 08:00:00
종전 후 전범국 일본은 미국의 요구에 의해 일명 '평화헌법'(헌법 제9조)을 제정하고 전쟁 포기를 선언해 ‘전쟁을 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었다. 그러나 2014년 집단자위권 행사를 허용하기 위해 헌법 제9조의 해석을 변경한 아베 내각은 미국정부의 지지를 등에 업고 2015년 안보법안을 통과시켜 마침내 일본을 다시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었다. ‘자국이 공격받지 않더라도 관계있는 주변국이 공격받으면 일본이 공격받는 것으로 간주해 공격에 나설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된 일본이 유사상황 시 미국과의 동맹 혹은 공조라는 이름으로―‘주권국가의 허락이 있어야한다’지만 한국의 전작권은 한미연합사령부에 있으므로―언제든 한반도에 진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지난 2015년 서울 중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 아베 정권의 '집단 자위권 법안(안보 관련 11개 법률 제·개정안)' 강행 처리 규탄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군국주의의 망령
최근 몇 년 사이 일본군국주의의 부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이미 집단자위권을 확보한 아베 신조 정권의 궁극적 목표는 군사력 보유와 교전권을 부인한 헌법 제9조의 폐기 내지 개정이다. 국가주의 교육의 강화는, 몇 달 전 보도된 바와 같이, 아베 내각이 ‘교육칙어’를 학교 교재로 사용해도 좋다는 각의 결정을 내렸다는 데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국가주의·군국주의 교육의 상징으로, 1890년 메이지 천황의 명으로 발표된 ‘교육에 관한 칙어(교육칙어)’는 일제강점기 식민지 교육정책을 위해 시행된 ‘조선교육령’의 바탕이었고, 1968년 말 박정희 정권이 만들어낸 ‘국민교육헌장’의 본보기였다.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교육칙어 역시 일본의 패전 후 연합군최고사령부(GHQ)에 의해 1946년 폐지됐었으나 이제 그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그러나 집단자위권에 대한 일본 내 반대여론에서 보이듯이, ‘헌법9조운동’을 전개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 온 일본국민들도 적지 않다. 종전 후 미국에 의한 강제적이고 왜곡된 일본군국주의의 해체가 아니라, 일본 내부로부터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청산하려는 움직임, 군국주의의 부활을 반대하고 평화운동을 실천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폭로하는 일본인, 국가권력이 조직적으로 행한 일본군 위안부 범죄를 사죄하는 일본인, 그런 양심들 속에 기억해야 할 한 인물이 있다. 젊은 시절 식민지 조선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조선의 청년들과 함께 노동운동을 하고 조선민족의 해방을 염원한 대가로 10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일본 청년, 그 식민지 조선에서의 삶과 투쟁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겨 ‘우리 청춘의 조선’을 세상에 알린 사람(1984년 일본에서 출판된 그의 저서 제목으로, 한국어판은 김계일 옮김, <우리 청춘의 조선>, 사계절, 1988), 노년이 되어서도 일본이 조선인들에게 행한 죄를 속죄할 것을 촉구했던 조일(朝日)노동자연대의 대표적 인물, 바로 이소가야 스에지(磯谷季次) 선생이다.
 
일본 군국주의 교육의 상징 교육칙어. 사진/뉴시스
제국주의 일본의 ‘비국민’, 이소가야 스에지(1907~1997)
<만인보>의 한 시는 이소가야 스에지가 투옥될 때까지의 생애를 일종의 전기처럼 소개함으로써 독자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조금 길지만 그의 청년시절을 보여주는 이 ‘전기’를 한 호흡으로 읽어보자.
 
1928년 일본 병사로 식민지 조선땅 밟다
조선군사령부 용산 병영 도착
곧 함경북도
조선 중국 러시아 국경 앞
나남사단에 배치되다
나남사단 제19사단 사령부
제88여단 사령부
보병
기병
포병 중
포병 제76연대 10중대
포병 일등병 이소가야 스에지(磯谷季次)
 
그가 3년 만기제대 뒤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다
3년간 전혀 달라져
함경남도
흥남질소비료공장 노동자로 들어가다
일본인 우두머리도
일본인 간부들도
조선인 노동자들도
이상하다 이상하다 고개를 꼬다
 
그 이소가야
겉은 일본인 노동자
속은 조선민족해방 지지자가 되다
 
1930년대 이래
조선인 노동자투쟁에 동참하다
10년
20년
일본인이 조선인보다 더 미워하는 일본인이 되다
조선인이 조선인보다 더 사랑하는 일본인이 되다
일본인이 아주 싫어하는 마늘 먹고
일본인이 아주 싫어하는 김치를 먹다
막걸리를 먹다
조선말 한마디 한마디 익히다
 
흥남질소비료공장
 
3교대 중노동 죽음의 공장
유산반
합성반
광석분쇄반
살인 공장
 
흥남 적색노조사건
1천명 검거
제2차 태로사건* (*태로: 태평양노동조합―저자 주)
제3차 태로사건
< … >
그때마다
그가 있다 드디어 검거되다
 
함흥형무소 수감
수번(囚番) 104번 이소가야
형무소 목공소에
일본인 전옥(典獄) 하라다가 나타나다
 
이 자식아 하필 조선놈의 하수인이냐
황공하옵게도
천황폐하를 모독하고
1억 신민의
야마또다마시이(大和魂)를 더럽힌 놈아
하고 욕 퍼붓고
지휘봉으로 머리를 치다 어깻죽지 치다
 
이소가야 돌아서서 부러진 이빨로 쇠리쇠리 웃다
(‘이소가야 스에지’, 27권)
 
1907년 일본 시즈오카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한 집안형편으로 인해 초등학교만 졸업한 후 목재소 심부름꾼, 자동차상점 조수, 목장 품팔이, 토목노동자 생활을 하며 10대를 보냈다. 그후 21세가 되던 1928년 일본군에 입대했고, 같은 해 5월 보병연대 보충병으로 소집되어 조선의 함경남도 나남(羅南)에 배치된다. 그가 근무한 나남의 19사단은 중국 동북지역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고 한다. 별 탈 없이 1930년에 제대한 그는, 앞의 시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남아 흥남의 조선질소비료공장에 취직한다. 그가 조선에서 노동자가 된 이유는 단지 돈을 모아 과수원을 하겠다는 소박한 꿈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연히 알게 된 조선청년들과의 인연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게 된다. 처음에는 일본인 사택촌에 있었으나 온돌이 치질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듣고 조선인 하숙집으로 옮긴 이소가야 스에지는 어느 날 밤 집주인인 손일룡의 사랑방 모임에 초대받는다. 그 자리에서 그는 공장이나 상점에서 일하는 20대의 조선인 청년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들은 1920년대 후반 동맹휴학을 주도하거나 ‘함흥청년동맹사건’ 등에 참여한 사회주의자 청년들로, 처음에는 그들의 대화를 절반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식민자’인 이소가야 스에지는 ‘피식민자’인 조선청년들을 통해 차츰 식민지 조선이 당하는 부당한 민족차별의 현실과 계급투쟁의 필요성을 배우면서 ‘연대’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양지혜, ‘‘식민자 사상범’과 조선: 이소가야 스에지 다시 읽기‘, <역사비평> 110호, 2015.2, 358-359쪽).
 
앞의 시가 전하는 ‘태로사건(태평양노동조합사건)’은 국제적인 상황 속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당시 조선의 노동운동계는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RILU, 프로핀테른)’의 1930년 ‘9월테제’와 태평양노동조합 비서부의 1931년 ‘10월서신’을 지침으로 삼아 활동했는데, 이러한 과정 중에 수차례의 적색노조사건들이 발생하게 된다. 1930년 말부터 1935년까지 4차에 걸쳐 일어난 ‘태로사건’은 그 대표적인 경우로, 태평양노동조합 비서부와의 연계 속에 진행된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소가야 스에지는 1931년 결성된 ‘흥남좌익’에서 일본인부(日本人部)의 책임을 맡게 되는데, 조직의 지도는 김원묵이, 조선인부와 자유노동자부는 송성관과 주선규가 각각 책임을 맡았다. 흥남좌익은 기관지 <노동자신문>을 발행하고 공장 내 ‘조합반’을 조직해 이를 바탕으로 혁명적 노동조합의 건설을 추진했다. 이소가야는 1932년 봄 노동조합의 전단계로 일본 노동자의 소비조합인 정장원(靜莊園)―일부러 ‘조합’이라는 명칭을 피했다고 한다―을 결성하고 일본어 기관지를 발간하는 활동을 담당했다. 흥남좌익은 그러나 1932년 메이데이를 준비하다가 발각되어 4월에 이소가야를 포함한 500여 명이 검거된다. 이것이 제2차 태로사건이다.
 
이소가야 스에지는 사건관련자들 중 최고형인 6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항소과정으로 인해 4년이 지체되면서―결국 항소를 포기해야 했다―거의 10년간 복역하게 된다. 매우 인상적인 것은, 다른 조선인 동료들이―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으나―다수 전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비타협적으로 전향을 거부했다는 점이고, 더욱 인상적인 것은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전향했던 조선인 동료들을 비난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는, 1940년 11월에 전향한 그의 스승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주선규가 마침내 출옥했을 때, 주선규의 형인 주인규의 집에 가 다른 동료들과 그의 출옥을 축하하고 주인규·주선규 형제와 “베개를 나란히 하고 이야기로 밤을 새웠”으며, 주선규의 폐가 악화되어 몇 번씩 보석이 되었어도 다시 잡혀 들어가는 바람에 자신보다 출옥이 늦어졌음을 밝히는데, 그러한 설명으로부터 그의 안타까운 심정이 느껴진다. 한 연구자의 지적대로, 어떤 기록에서도 주선규의 타협 사실을 밝히지 않았던 그는 타협자와 비타협자라는 구분이 아니라 식민지 사법당국의 잘못만을 명시했던 것이다(양지혜, 앞의 글, 364-366쪽).
 
일본 측으로부터 '조선의 60만 내지인 중 유일한 비국민'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이소가야 스에지는 함흥형무소와 서대문형무소에서 10년을 복역하고 1942년 1월 21일 만기 출옥했다. 그 후 장사를 하거나 공장을 떠돌다가 해방을 맞은 그는 함흥일본인위원회에서 패전국민인 일본인의 귀환을 위해 일했고, 1946년 11월 소련군의 ‘일본인 철수명령’으로 함흥을 떠나 1947년 1월 마침내 일본에 도착하게 된다.
 
한 일본인 노동자가 가르쳐 준 연대의식
귀환 후 이소가야 스에지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여러 권의 책과 글들을 남김으로써 식민지와 해방 직후의 조선의 현실을 전했다. 그뿐 아니라, 북한의 민주화를 염원하며 <좋은 날이여 오라-북조선 민주화를 위한 나의 유서>라는 책(일어판, 1991)을 쓸 정도로 조선을 사랑하고 남북한의 미래를 걱정한 진정한 평화주의자였다. 그는 과거사를 제대로 반성하고 사죄하지 않는 일본정부의 역사인식에 대해서도 비판을 잊지 않았다. 이소가야 스에지가 청춘 시절 간직했던 조일혁명연대, 노동자연대의식은 민족과 국가를 넘어서는 ‘평화적 연대의식’으로 그의 노년에도 순정(純正)하게 간직되었다. 그가 1991년 4월, 84세의 나이로 한국을 방문해 자신이 수감되었던 서대문형무소―당시 서대문독립공원 조성을 위해 공사 중이던―내에 남아 있는 옥사(獄舍)와 사형집행장을 둘러보고 일본으로 돌아가 남겼다는 글을 여기에 재인용해 함께 음미하고자 한다.
 
“일본은 내각이 교체됐다. 신임 총리대신과 외무대신 등이 일본이 한국 국민에게 행한 죄를 속죄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죽은 자에 대한 사과의 말과 위령(慰靈)도, 또한 작년에 크게 문제가 된 위안부에 대한 보상문제도 ‘모두 이미 해결이 끝난 문제’라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서대문형무소에는 나 자신도 관련되어 있다. 나는 이곳에서 처형당한 사람들의 위령을 위해, 또한 주마가편(走馬加鞭)의 심정으로 외무성(外務省)에 진정(陳情)을 속할 생각이다. 내 힘으로 이루지 못하거든 여기에 관심 있는 일본인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받고 싶다.“ (양지혜, 앞의 글, 344-345쪽에서 재인용)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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