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67화)어떤 선사(禪師)의 자취
“허어 참선하기 좋은 곳이로다”
입력 : 2017-05-29 08:00:00 수정 : 2017-05-29 08:00:00
경주 남산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산 이곳저곳에 감추어진 다양한 석불들을 보물찾기 하듯 만나게 된다. 찬연히 꽃피웠던 불교문화의 흔적이리라. 신라와 고려조에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고 융성기를 이루었으나 세속적 위세 또한 지나쳤던 한국불교는 조선조에 이르자 성리학의 기치 아래 국가적 탄압을 받으며 임진왜란처럼 필요할 때에만 임금이 승병으로 불러내는 대상이 되었다. 식민지 시절에는 일제의 사찰정책에 대항해 민족불교를 수호하려는 승려들이 ‘사찰령’(1911)의 통제를 피하기 위해 ‘사(寺)'나 ‘암(庵)'이 아닌 선학’원(院)’을 세우기도 했다. 그들 중 항일독립운동을 한 스님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경주 남산에 있는 불곡마애여래좌상 (보물 198호). 사진/필자 제공
 
스승과 제자
3·1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 대표였던 백용성(1864~1940)과 한용운(1879~1944)은 민족대표―후에 많은 이들이 변절해 ‘민족대표’라는 말이 무색하지만―들을 결속해 실질적으로 3·1독립선언을 주도했던 인물들이다. 불교대표의 수가 2인으로 된 것은 용성스님이 천도교와 기독교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종교별로 각 10인이던 대표의 수를 다른 종교에 양보했기 때문이라 한다.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해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불교의 전통을 수호하면서도 불교의 근대화와 대중화를 위한 개혁에 주력했던 이 두 스님은 대중들이 불교 교리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경전의 한글화에도 힘을 썼다. 이들은 또한 남전·도봉·석두·만공·성월 등과 함께 안국동 선학원 설립(1921)의 공동 주체이기도 하다. 용성 진종과 만해 한용운이 3·1독립선언문으로 인해 투옥되었을 때 옥바라지를 한 이는 각각 그들의 상좌(주요 제자)였던 동산(1890~1965)과 춘성(1891~1977)이었다.
 
< … >
 
이 3·1운동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 중
불교 승려 2인
백용성과
한용운
그들이 1년 반 동안 3년 동안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동안
 
그들의 상좌
백용성의 상좌 동산
한용운의 상좌 춘성
 
한달에 한번 함께 면회더라
 
춘성은
인찰지(印札紙) 꼰 것을
간수 몰래 창틈으로 받았더라
나와서 펼쳐보니
놀라워라
조선독립이유서가 빼곡히 씌어 있더라
그것을 상해로 보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 실었더라
 
이런 춘성과 동산이
함께 면회 갔다 와
함께 도봉산 망월사에 가
좌선삼매에 들더라
 
잘 때도
앉아 졸더라
스승이
차디찬 옥방에 계시니
어찌 우리인들
편히 누워서 잘 수 있으랴
 
앉아서 자고
앉아서 깨어나더라
 
< … >
(‘두 상좌’, 24권)
 
시에서도 언급되듯이, 만해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일본인 검사의 심문에 대한 답변으로 작성한 ‘조선 독립의 서’는 춘성스님을 통해 상해로 보내져 <독립신문> 1919년 11월4일자에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 개요'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만해뿐 아니라 용성, 만공의 제자이기도 한 춘성은 육두문자의 사용과 파계행위, 철저한 수행을 병행했던 인물로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예를 들자면, 60~70년대 “낮에는 양복을 입고 종로다방에 나와 / 이년아 / 이 이쁜 년아 / 하고 다방 아가씨들과 놀고 // 밤에는 도봉산 망월사로 돌아가 / 밤새도록 바깥에서 행선(行禪) 삼매중”이거나, “대통령부인 육영수 생일날 법상에 올라 / 오늘은 육영수가 / 제 에미 ××에서 빠져나온 날이다 좋은 날이다”라는 말만 하고 내려와 “법회에 참석한 사람들 사색”으로 만들거나(‘춘성선사’, 15권), “이불 없이 살”면서 “절 뒤안에 항아리 묻어 / 거기 물 채워 / 물속에 들어가 / 머리 내놓고 졸음 쫓는” 선정(禪定)으로 “기어이 수마(睡魔)를 모조리 내쫓아버”리거나(‘춘성’, 25권) 하는 것이 그것이다.
 
혹자는 그의 파격적인 언행을 허위의식이 없고 ‘아무 걸림이 없는 ‘무애(無碍)’로 여기고 또 혹자는 그것을 불편해 하지만, 실은 그가 신도들이 해 준 양복을 입고 나가 걸인들에게 벗어주고 오고 돈이 생기면 다 나누어 주는 무소유를 실천했다는 주위의 증언, 평생 독방을 쓰지 않은 채 대중들(다른 승려들)과 똑같이 큰방에 살며 잠도 거의 없는 엄격한 수행을 했다는 증언들에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겠다.
 
지난해 서울 성북구 만해 한용운 선사의 유택 심우장에서 열린 '만해 한용운 선사 72주기 추모제'에서 선학원 이사장 법진 스님이 헌향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고봉 경욱(古峰 景昱, 1890~1961)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으로, 대구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익힌 한학에 정통한 유생 출신이었던 고봉스님은 1911년 출가하러 통도사에 갔을 때 모여 있는 스님들에게 반말로 자신의 머리를 깎아주지 않겠냐고 할 정도로 ‘아만(我慢)’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래의 시와는 조금 다르게, 그가 양산 통도사에서 스승 혜봉을 따라 상주 남장사로 가 행자생활을 할 때 혜봉은 그의 머리를 약 두 달간 깍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그는 철저한 수행으로 아만을 넘어섰을 뿐만 아니라 ‘부처를 보고 중생을 보는’ 선사가 되어 항일운동을 하게 된다.
 
1911년 상주 남장사 혜봉을 찾아갔다
다음날 머리 깍았다
머리 깍을 놈
뜸 들일 것 없다
알아볼 것 없다
다음날 바로 머리 깍았다
1915년 파계사 성전
바위너설에 앉아
비비람 맞고
이슬 맞으며 선정삼매
멀리서 스승 혜봉이 이 소식 들었다
 
흐흐흐
내가 머리 깍은 놈 가운데
가장 괘씸한 놈이로고 흐흐
하고 기뻐하였다
 
1922년
정혜사 만공 찾아갔다
너 왜 왔느냐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소승은 태초 이래
여기 있었습니다
 
만공이 괘씸한 놈이다 하고 함박웃음 인가하였다
 
< … >
(‘고봉’, 25권)
 
손이 크시다
상해 임정에 자금 보냈다가
아홉 끗 발각되었다
< … >
3년형
1년 반 옥방살이
 
입이 크시다
허어 염불하기 좋은 곳이로다
관세음보살
십만번 이상을 불렀다
내장이 크시다
허어 참선하기 좋은 곳이로다
옥방살이 하루 4분 정진
묵조선
 
그가 숭산의 은사이다 함께 술 한병으로 법을 마셨다 오줌줄기 되알졌다 세찼다
(‘고봉 스님’, 24권)
 
1919년 3월8일 대구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죄목으로 1년6개월간 투옥되어 고문을 당한 고봉스님은 마산형무소에서 석방된 후 양산 내원사의 혜월스님을 찾아가 함께 ‘선농생활’을 하게 된다. 1922년에는 만공스님으로부터 법맥을 이어받게 되니 경허의 세 달―수월, 혜월, 만공―중 두 달을 거쳐 간 셈이다. 내원암의 젊은 수행자들은 혜월스님의 지시에 따라 산을 개간해 농토를 만드는 고된 운력을 하고 있었는데, 끼니가 너무 형편없어 고생 중이었다. 고봉스님이 벌인 유명한 일화들 중 하나가 이때 발생하게 된다. 어느날 혜월스님이 부산으로 출타한 틈을 타 고봉이 몇몇 수좌들과 함께 혜월이 애지중지하던 소를 양산장터로 끌고 가 팔아버린 것이다. 그 돈으로 대중공양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는데, <만인보>는 그 당시 벌어진 상황을 해학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 … >
 
고봉이 절의 소 한마리를 팔아버렸다
혜월이 소 어디 갔느냐 물으니
고봉이 옷 할딱 벗고
음매음매
하고 울었다
혜월이 고봉의 궁둥이를 쳤다
내 소는 어미소지
요런 송아지가 아니로다
 
이 소식 듣고
조실 만공이 괘씸한 놈들이로고 하고 껄껄 웃으며
두짝 문을 활짝 열었다
 
저녁 무렵 매미소리가 산지사방 해일로 쳐들어왔다
(‘고봉’, 25권)
 
옷을 벗고 알몸에 네 발로 기어다니며 소 울음을 내던 고봉은 ‘내 소는 어미 소이지, 이런 송아지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혜월에게 ‘새끼소가 어미 소 된다’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거침없는 고봉의 행적은 만공스님과의 일화에서도 나타난다. 만공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정혜사에 머무르던 고봉은 동안거 때 쓸 양식 마련을 위해 다른 수좌들처럼 마을로 탁발을 하러 떠났는데, 여러 날 후 빈손으로 당나귀를 타고 돌아와 만공에게 당나귀 삯을 물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가 당당하게 설명한 이유는 이러하다. 그가 탁발하여 번 것은 모두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고, 보름(혹은 열흘)동안 절에서 먹지 않았으니 그만큼 쌀을 벌어놓은 것과 같다, 그러니 당나귀 삯 정도는 스님이 물어주셔도 손해가 아니라는 것. 과연 선사의 깊이가 우러나는 수행 일화가 아닌가.
 
행원의 스승
앞서 시에서도 나왔듯이, 고봉스님은 숭산 행원(1927~2004)의 은사스님이다. 즉 ‘행원(行願)’이라는 법명을 지어주고 제자로 받아들인 이가 고봉이다. 숭산스님이 고봉스님을 찾아가 자신의 수행 정도를 점검 받고 인가를 받는 장면은 <만인보>에 희곡처럼 입체적으로 재현된다.
 
수덕사로 건너갔다
당대 선객 고봉 앞
웬놈의 술 한병 들고 나타났다
 
고봉 가로되 해괴하구나
 
행원(行願) 외치되
삼세제불이 어제저녁에 다 죽어
장사 지내고 오는 길입니다
스님 어찌하시렵니까
 
고봉 가로되
무엇으로 증명하는고
행원 (술병을 내밀며)
이것이 장사 지낸 찌꺼기입니다
고봉
한잔 따르라
행원
잔을 내놓으십시오
고봉
손을 내밀었다
행원 (술병 내려놓으며)
그게 잔입니까
고봉 (눈 크게 뜨고)
쥐가 고양이밥 먹다가 밥그릇을 깼구나
행원
………
고봉
틀렸다
 
< … >
(‘행원’,24권)
 
고봉은 행원에게 1700개의 공안 중 가장 난해한 것들을 질문한다. 마지막 공안에 대답하지 못하던 행원은 스승과 50여 분의 침묵 끝에 답을 내놓고 마침내 스승의 인정을 받는다. 훗날 한국불교를 해외에 알리는데 큰 공헌을 한 숭산스님과 그의 스승 고봉스님의 모습이다. 이런 선사들은 언제 다시 우리를 찾아올까?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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