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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단식의 과학, 단식의 힘
2016-10-04 10:54:57 2016-10-04 10:54:57
80년대 대학을 다녔다. 단식의 경험은 없으나, 단식의 경험담을 들을 기회는 잦았다. ‘집단’과 ‘연대’의 힘이 위력을 발휘하던 시절이라 단식투쟁의 풍경도 그러했다. 명동성당에서는 수시로 수십, 수백 명이 한꺼번에 단식투쟁을 벌였다. 그 대열에 합류했던 동기 여학생이 있었다. 뭐가 가장 먹고 싶었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명동성당 입구 정면에 중국집이 하나 있잖아. 다행히 음식이나 먹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는데 냄새만큼은 막을 수가 없는 거야. 일단 냄새를 맡으면 음식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데 그게 너무 힘들더라고.”
 
얼핏 그 친구의 눈에 눈물이 비쳤던 것 같다. 위로한답시고 던진 농담이 고작 이랬다. “그 중국집 주인은 알았을까? 민주화 투쟁의 최전선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단식을 방해했다는 사실을?” 가슴은 뜨거웠으나 철없던 시절이었다. 언젠가 그곳에 가서 밥을 사주겠다던 약속은 끝내 지키지 못했다. 지금도 뉴스에서 ‘단식’이라는 단어를 접하면 그 동기 여학생과 중국집이 떠오른다.
 
몇 해 전 2년 동안 세 번이나 파리를 가는 호사를 누린 적이 있다. 일행이 있을 때나, 혼자 갔을 때나 루브르 박물관을 거르지 않았다. 그곳에서 가장 눈길을 끈 작품은 모나리자도, 밀로의 비너스도 아니었다. 예리코가 그린 ‘메두사 호의 뗏목’이었다. 우선 가로 5m, 세로 7m의 크기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여기에 난파당한 메두사 호와 뗏목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걸음을 떼기가 어렵다. 
 
메두사 호는 1816년 세네갈로 가는 도중 난파한다. 구명보트를 타지 못한 149명은 뗏목에 올라 13일 동안 표류한다. 이 가운데 구조된 생존자는 15명. 그림은 13일 동안 표류 끝에 구조선을 발견한 장면을 포착해 묘사하고 있다. 이후 생존자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진다. 이들은 동료의 시체를, 심지어 목숨이 붙어 있는 사람까지 먹었다. 살기 위해서. 나는 배고픔이나 굶주림의 끝을 감히 알지 못한다. 다만 그 그림을 떠올리며 인간과 동물의 허물어진 경계선을 짐작할 뿐이다.    
 
단식이나 굶주림이 이처럼 극단적인 것만은 아니다. 어떤 전문가들은 정크 푸드와 탄산음료, 다량의 설탕과 염분, 카페인에 익숙해진 직장인의 심신을 맑게 하는 방법으로 단식(혹은 금식)을 권한다. 실제 실리콘밸리의 한 벤처는 월요일 저녁부터 수요일 아침까지 직원들이 단체로 금식한다. 몸의 균형을 되찾고 활발한 두뇌활동을 위해서다. 그 회사의 생산성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알 수 없지만, (강요하지만 않는다면) 건강에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됐으리라. 
 
건강과 다이어트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단식에 관한 연구도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른바 ‘단식의 과학’이다. 연구 결과, 단식은 여러 생리적 변화를 가져오는데 가장 긍정적인 측면으로 ‘인슐린 유사성장인자 1(IGF-1)’을 꼽을 수 있다. 성장과도 연관이 있지만, 성인에게는 노화와 암을 유발하는 물질로 알려져 있다. 단식하면 IGF-1의 분비가 줄어 노화와 암 발병률을 늦출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간헐적 단식’ 역시 인지 능력을 높이고, 평균 수명을 늘리는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사람만 단식하는 것은 아니다. 동물도 병이 들면 굶는다. 몸 내부에서 스스로 치유할 힘을 만들기 위해서다. 야생동물이 겨울잠을 자는 것과 추운 겨울을 앞두고 잎을 떨어뜨려 성장 속도를 늦추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단식의 이유는 같다. 살기 위해서다.  
 
지난 며칠간 여당 대표의 단식이 화제였다. ‘죽더라도 중단은 없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했지만, 다행히(?) 일주일을 넘기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살았다. 여당 내부에서조차 ‘얻은 것 없는 싸움’이었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오는 모양인데 그건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일시적 단식(혹은 금식)은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많다. 무엇보다 머리가 맑아진다는 게 연구자들이 공통된 견해다. 맑아진 머리로 이제 이성과 상식을 찾았으면 좋겠다. 누구 말처럼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 아닌가. 
 
문득 궁금하다. 그 시절 단식투쟁 대열에 합류했던 동기 여학생은 중국 음식이 가장 생각났다는데, 여당 대표는 단식하는 동안 어떤 음식이 가장 생각났을까? 일전에 먹었다던 송로버섯이나 샥스핀? 이런 실없는 궁금증과 함께 그림 ‘메두사 호의 뗏목’의 장면이 머리를 스친다. 좌초하는 배 위에 타고 있다는 기분이 자꾸 들어 씁쓸하다. 
 
김형석 <과학 칼럼니스트·SCOOP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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