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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의 파리와 서울 사이)국민안전 못 지키는 국가를 무엇에 쓰랴
2016-06-14 06:00:00 2016-06-15 18:22:53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케임은 1897년 <자살론>에서 도덕적·종교적·공적 가치의 상실과 소멸, 그리고 정신이상 증후가 보이는 사회 현상을 아노미(Anomie)라 표현했다. 아노미는 급격한 사회변동으로 인해 종래의 규범이 약화되거나 쓸모없게 되고 아직 새로운 규범 체계가 확립되지 못해 사회나 개인이 혼란 상태에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나 개인이 혼란에 빠진 상태.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급격한 근대화와 초고속 경제성장 속에서 기존의 가치와 규범들을 꽤나 상실한 한국의 상태를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과거 우리가 중시했던 가치들이 파괴되고 각종 흉악범죄가 증가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이 이를 방증한다. 강남역 ‘묻지마’ 살인 사건, 부산 각목 폭행사건, 수락산·사패산 여성 등산객 살인 사건에 섬마을 여교사 성폭행 사건까지. 병든 사회의 증후군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우리는 두려움에 전율한다.
 
하지만 정치권은 무너져 가는 사회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대책 마련에 그다지 고심하지 않는 눈치다. 언론이라도 ‘제4의 권력’으로서 안전한 사회로 나아가는 길이 무엇인지 담론 형성에 앞장섰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신통치 않다. 오히려 흉악범죄를 재탕, 삼탕 온종일 보도하고 있어 모방범죄를 유도하는 것은 아닌지 내심 걱정이 크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원망이 앞서고 의문이 제기된다. 과연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화장실도 마음대로 갈 수 없고 대낮에 산행도 할 수 없는 위험한 이 나라, 도대체 정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프랑스 사회도 우리만큼이나 심각한 아노미 현상에 빠져 있다. 도덕적·종교적·공적 가치가 파괴되면서 몰상식한 범죄가 판을 치고 사회적 불안은 커져간다. 2016년 5월26일 프랑스 여론조사 기관 피뒤시알(FIDUCIAL)과 오독사(Odoxa)가 ‘프랑스인의 안전’에 대해 조사한 결과 프랑스 국민의 안전에 대한 불안감은 날로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범죄자들의 몰상식한 행동에 대한 두려움이 39%로 가장 컸고, 테러리즘에 대한 두려움(21%), 강도에 대한 두려움(16%) 등의 순이었다. 프랑스인들은 안전 강화 대책으로 보다 많은 경찰과 군인, 경비원을 보강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오는 2017년 4월 실시되는 대선에 나갈 주자들은 앞다퉈 안전을 이슈로 삼고 정책 개발에 힘쓰고 있다. 특히 니콜라 사르코지 공화당 대표는 오는 11월 치러질 당내 경선과 내년 4월에 있을 대선을 겨냥해 ‘프랑스인의 안전 강화’를 위한 계획을 제시했다. 그는 “만약 2017년 우파가 승리한다면 기동대의 사명을 재정의하고, 지방 경찰의 역량을 강화하며, 청소년 범죄·테러리즘과 전투를 벌이고, 형무소를 신축하고, 세관과 형무 행정을 합쳐 ‘큰 부처'(grand ministère)를 신설하겠다”고 말한다.
 
사르코지 대표는 “안전 문제는 최우선의 당면 과제”라며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담보하지 못한다면 그 국가는 무엇에 소용이 있느냐“고 자문한다. 국가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는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시라크 정부에서 내무부 장관을 지내면서 프랑스인의 안전을 무엇보다 중시했던 그의 의지로 2007년 대선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을 상기하고, 이를 2017년 대선에서 재현하고자 하는 전략이다.
 
이와 달리 한국의 정치권은 국민의 안전을 위한 치안문제에 왜 민감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지 답답할 지경이다. 프랑스의 경우 대선 후보들이 앞다퉈 자국민의 안전을 위한 대책 마련에 주력하고 있지만, 우리 정치권은 특별한 대책도 없이 수수방관만 하고 있는 모양새다.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 국가는 무용지물이 되기 십상이다.
 
한국의 주요 정당들은 2017년 대선에서도 쟁점을 경제로 잡아가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경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안전이다. 아노미 상태에 빠진 한국 사회에서 국민의 목숨이 걸린 안전을 지키는 일보다 시급한 국가의 역할은 없다. 경제도 좋지만 안전의 문제를 오는 대선의 최대 과제로 쟁점화하고 정책경쟁에 불을 지피는 당과 정치인이 나오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최인숙 파리정치대학 정치학 박사 
 
* 편집자 주 : 필자 최인숙은 파리에서 10년간 체류했고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Paris)에서 한국, 일본, 프랑스 여론 연구로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파리와 서울 사이’는 한국과 프랑스의 정치·사회현상을 비교 분석하는 연재 코너로 <뉴스토마토> 지면에는 매주 화요일자 23면에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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