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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추억을 판다…노인들의 문화놀이터 ‘실버영화관’
300석의 작고 오래된 영화관, 지금은 100만 어르신이 찾는 문화명소로
“망해도 좋다. 사회적기업은 셈이 아닌 진심을 담아야 한다”
2016-05-12 10:21:39 2016-05-12 10:21:39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빨리 늙어가는 국가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은 지난 2000년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7%를 넘어 국제연합(UN)이 규정한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고, 오는 2026년이면 20%를 돌파해 초고령 사회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웃나라 일본이 초고령 사회 진입에 걸린 36년과 비교해 10년이나 빠르다. 이로 인해 노인복지 문제가 중요한 국가적 화두로 떠올랐지만 현실은 참혹하다. 한국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수년째 이어오고 있다. 국가 정책의 부재와 사회적 관심의 빈곤 속에 '추억을 파는 극장'이 눈에 띈다. 김은주 대표는 실버세대를 대상으로 하는 사회적기업이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김 대표는 “평생 열심히 일하신 어르신들이 ‘그래도 마지막에는 잘 놀다간다’고 생각할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것이 참다운 복지이고 효도”라며 “어르신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언제든 들려 행복한 하루를 지낼 수 있는 문화공간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추억에 젖은 노인들의 눈시울이 극장에 있다.

[뉴스토마토 이성휘기자] 55세 이상이면 본인과 동행인이 단돈 2000원에 고전 영화를 볼 수 있는 극장이 있다.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 4층에 위치한 실버영화관 ‘허리우드 클래식’이다. 지난 8일 어버이날에도 영화관에는 어르신들이 모여들었다. 말끔하게 양복 정장을 차려입은 60대 남성부터 지팡이를 쥐고 힘겹게 몸을 움직이는 80대 노파까지, 로비에 운집한 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운다.
 
흑석동에서 왔다는 70대 노부부는 “자식들이 외국과 지방에 있어 오전에 통화하고 부부 동반으로 영화를 보러 왔다”며 “옛날 생각도 나고 영화관에서 만나는 친구들도 있어서 자주 온다”고 말했다. 이제 극장에 나온 지 3주 됐다는 60대 남성은 “극장이 오래돼 시설이 맘에 안 든다”고 불평을 늘어놨다가 옆 테이블에 앉은 동년배 여성으로부터 “이 정도면 옛날 분위기도 나고 좋지 뭘 그래”라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극장에 다닌 지 5년이 넘었고 상영작이 바뀔 때마다 찾는다는 이 여성은 “우리는 경로우대 대상이라 몇 천원만 더 내면 큰 극장에서 최신 영화를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젊은 시절 봤던 영화를 큰 화면에서 볼 수 있고 옛 추억도 떠올라 여기를 찾는다”며 실버영화관의 장점을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핀잔을 들었던 남성도 옆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김은주 추억을 파는 극장 대표. 사진/추억을 파는 극장
 
“망해도 좋다. 노인들을 위한 문화공간을 만들어 보자”
 
사회적기업 ‘추억을 파는 극장’의 김은주 대표(42)가 옛 허리우드 극장을 실버영화관으로 재개장한 것은 지난 2009년 1월이다. 김 대표는 “이 일을 하기 전에는 작고 오래된 극장에서 영화 시사회를 열어 극장을 부흥시키는 사업으로 돈을 벌었다”며 “당시 경영이 어려웠던 허리우드 극장에서도 한 번 해보라는 요청이 들어와서 이곳과 인연을 맺게 됐다”고 설명했다.
 
2008년경 시사회 준비를 위해 허리우드 극장을 찾은 김 대표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종로3가 인근을 배회하던 노인들이었다. 김 대표는 “노인들을 위한 문화공간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어차피 사람들은 다 늙고, 나도 늙으면 있을 곳이 필요하다. 문화에 목마른 노인들이 찾을 수 있는 공간을 남이 만들어주는 것을 굳이 기다리지 않고 내가 한 번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시작했다”고 말했다.
 
‘망해도 좋다. 기왕이면 젊은 나이에 망하자’라는 다짐으로 시작했지만 영화관 운영은 예상 이상으로 녹록치 않았다. 사업 초기 SK케미칼의 후원을 이끌어내 영화관 월세 절반인 1000만원을 매월 지원받았지만 2000원에 불과한 영화 관람비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사재를 털어가며 버텼지만 사업 시작 3년여 만에 신용불량자 위기까지 몰렸다.
 
김 대표는 “자본주의적 논리로만 본다면 극장의 문을 닫는 것이 맞다. 영화관에 올릴 작품의 국내 판권을 해외 필름 마켓에서 직접 구입하는데 매년 3억원이상 들어간다”며 “극장 임대료도 있다. 건물주가 우호적이라 사정을 봐주고 기업 후원도 받지만 부담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김 대표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극장을 찾는 단골 어르신들의 응원이었다. 김 대표는 “한참 힘들었을 때 아무 때나 갚으라며 3000만원을 그냥 빌려주신 분이 있었고, 땅 문서를 들고 오신 분도 있었다”며 “이 분들이 얼마나 문화공간에 목 마르셨으면 이렇게까지 응원해주실까 하는 생각에 버틸 수 있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다행히도 극장을 찾는 관객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2009년 6만5000여명으로 시작해 설립 6년 만인 지난해 누적관객 100만명을 돌파했다. 최근 일일 관객수는 800~1000명으로, 300석 규모의 객석이 종종 매진된다. 김 대표는 “이제 크게 손해를 보는 것 같지는 않다”고 말한다.
 
영화 상영을 기다리며 극장 로비에 모여있는 노인들. 사진/뉴스토마토
 
노인의, 노인에 의한, 노인을 위한 극장
 
실버영화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노인 맞춤형’ 배려들은 극장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노인들의 감퇴된 시력을 감안해 자막 크기는 일반 극장의 1.5배로 키웠고, 자막 위치도 하단 맨 끝이 아닌 중간 아래쯤에 배치했다. 상영관 안에는 거동이 불편한 분들을 위해 곳곳에 손잡이를 달아뒀고 이동을 도와주는 직원도 있다. 노인세대가 모바일이나 인터넷에 취약하다는 것을 감안해 예매 서비스는 없다. 표는 당일 아침 현장 판매된다.
 
극장 직원 대부분이 70세를 넘은 노인들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김 대표는 “총 직원이 28명인데, 젊은 층은 저를 포함해 3명에 불과하다”며 “나머지는 70대로 직원 평균연령이 69세다. 최연장자는 80세를 넘겼는데 개관 초기에 입사해 7년째 근무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계속 일하고 싶다면 본인 체력에 맞게 근무 패턴을 조정한다”며 “어르신들이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공간과 더불어 자부심을 갖고 웃으면서 일할 수 있는 곳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극장 주변에 밥집 ‘추억더하기’와 여성들의 미용을 위한 ‘어르신뷰티살롱’ 등 노인대상 사업을 확장했다. 이용비용은 모두 3000원이며 근무자들 대부분이 65세 이상 노인들이다. 김 대표는 “극장운영에 최선을 다하면서 다른 업종들과도 시너지 효과를 내고 싶다”며 “어르신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언제든지 들려 행복한 하루를 지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나의 미션”이라고 강조했다.
 
실버영화관의 지방 확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김 대표는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노하우를 전수하고, 확보하고 있는 상영작도 저렴하게 공급한다”며 “해외에서 1000만원에 영화 판권을 사오면 50만원에 배급해주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김 대표에 따르면 서울 허리우드 클래식 외에도 인천 미림극장, 경기 안산명화극장, 대구 그레이스실버, 충남 천안 실버명화극장 등의 실버영화관이 있다. 모두가 각자 다른 법인이며, 사회적기업으로 운영 중이거나 인증을 준비 중이다.
 
실버영화관에 걸린 상영작 예고. 사진/뉴스토마토
 
“지나치게 이윤추구하면 초심 잃을까 두려워”
 
김 대표는 사회적기업 경영자는 균형감각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외부의 지원에 의지하지 않고 자립할 정도의 이윤 추구는 당연하지만, 지나친 수익 추구는 금물이라는 것이다. 김 대표는 “사회적기업이 지나치게 이윤을 추구하기 시작하면 초심을 잃거나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이 보이지 않을 수 있다”며 “손님이나 직원보다 경영자가 행복하다면 그건 사회적기업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사회적 기업은 힘들게 가는 것이 맞다. 그래야 기업을 운영하다 어려움을 겪어도 해결법이 나온다”고 강조했다.
 
그러한 가시밭길을 김 대표는 걸어볼만한 길이라고 추천한다. 그는 “일반 대기업에 들어가면 서브지만, 사회적 기업은 자신이 메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면서 “다만 셈이 아닌 진심이 중요하다. 진심을 담아 도전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 사회적기업”이라고 조언했다.
 
영화시작 전 관객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추억을 파는 극장

이성휘 기자 noirciel@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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