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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의 파리와 서울사이)위험사회에서 수호자 되려면 '프로'가 되어라
2016-05-10 06:00:00 2016-05-11 09:08:15

독일의 사회철학자 울리히 벡은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를 ‘위험사회’로 규정했다. 근대화의 길을 숨 가쁘게 달려와 이제 풍요사회를 이뤘다고 자축하는 순간 안전을 위협하는 문제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전기문화에 도취되고 화려한 소비문화에 빠지는 순간 원자력 발전소는 늘어가고 인류는 후쿠시마와 같은 대재앙을 맞게 된다.

 

최근 한국사회에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는 옥시 가습기 살균제 사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화학제품의 혁명으로 편리함에 도취되는 순간 화학제품은 홍수를 이루고 '안전의 공포'라는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가습기 살균제 발명으로 세척이 용이해졌다고 미소를 지었지만 옥시레킷벤키저의 폴리헥사메틸렌 구아니딘(PHMG) 성분은 선량한 239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그것도 모자라 1528명이라는 피해자를 낳았다. 가정의 달인 5월은 ‘내 아이를 살려내라’, ‘형님을 살려내라’ 울부짖으며 영국 옥시를 상대로 항의 시위하는 피해자들의 피눈물로 범벅되고 있다.

 

이 사태를 지켜보면서 분노어린 질문이 솟아오른다. 과연 국가란 무엇인가. 이 참사에 한국 정부는 왜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는 것일까? 위험사회에 노출된 국민을 지키기 위해 국가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적어도 환경부 장관과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 사태에 얼굴을 드러내고 수습을 위한 분주한 행보를 보여야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사실 한국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는 옥시 가습기 살균제에 들어있는 화학물질 PHMG에 노출된 사람의 폐 손상 위험률이 노출되지 않은 사람의 116배가 넘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 귀중한 정보를 국민에게 알리지 않은 채 묵인했다. 이런 정부가 수호천사가 돼 줄 것이라고 믿고 있는 우리들은 가엾기 짝이 없는 '호갱'이 아닐 수 없다.

 

한국과는 달리 서구 선진 민주국가들의 초미의 관심사는 국민 건강과 환경 보호다. 프랑스 역시 선진 국가답게 자국민의 건강과 환경 보호를 위해 전력질주하고 있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환경을 현 정부의 3대 당면 과제 중 하나로 삼고 환경부 장관에게 막중한 권한을 주며 내각 서열 3위 자리에 앉혔다. 현 프랑스 환경부 장관에는 지난 2007년 대선에서 사회당 후보로 출마해 고배를 마셨던 거물급 정치인 세골렌 르와얄이 임명되어 3년째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르와얄 장관은 지난해 6월15일 공영TV인 <France3>에 나와 살충제 피해와 전면전을 펼치기 위해 미국 농화학의 거대 기업인 몬산토의 라운드업을 원예전문 매장에서 셀프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겠다고 발표하고, “프랑스는 이 살충제 사용 저지를 대공세로 몰아가야 한다”고 천명했다. 이 조치는 세계보건기구 산하 국제 암연구센터가 '라운드업이 인체에 암을 유발하는 글리포세이트 물질을 함유하고 있다'고 분류한 후 프랑스·유럽의 위생기관과 소비자 연합회, 농업부 장관이 이 제품을 아마추어 정원사들에게는 더 이상 셀프 판매하지 않도록 당부한 직후 취해진 것이었다.

 

르와얄 장관은 또 스테판 르 폴 농산부 장관과 함께 공식성명을 통해 2018년 1월1일부터 아마추어 정원사들은 자격증을 가진 판매자의 중개에 의해서만 이 살충제 구매가 가능하다고 밝히고, 아마추어 정원사가 이 제품을 구매할 때 판매자는 라운드업이 곧 판매 금지된다는 사실과 대체재에 대한 정보를 조언해 줄 것을 언명했다.

 

이렇게 프랑스 정부는 국민의 건강과 밀접한 사안이 부각되자 신속하게 대처했고, 환경부 장관은 TV를 통해 라운드업의 위험성을 홍보하는 등 투명한 정보를 공개함으로써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켜 주었다. 한국의 보건복지부가 가습기 살균제의 위험성을 인지하고도 그 정보를 서랍 속에 잠재운 것과는 너무나 다른 행보가 아닐 수 없다.

 

국민의 생사가 달려있는 문제를 이렇게 무사안일하게 다룬 한국 정부의 안전불감증은 어디서 기인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한국 정치인들의 아마추어리즘이 큰 요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위험사회가 갈수록 확대되는 이 시기에 국민의 수호자가 되려면 매사에 긴장하고 일사불란하게 대처하는 프로페셔널리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점을 철저히 인식하고 배양할 때 한국 정치인들은 5000만 국민의 목숨을 책임지는 진정한 수호자로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최인숙 파리정치대학 정치학 박사
 
* 편집자 주 : 필자 최인숙은 파리에서 10년간 체류했고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Paris)에서 한국, 일본, 프랑스 여론 연구로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파리와 서울 사이’는 한국과 프랑스의 정치·사회현상을 비교 분석하는 연재 코너로 <뉴스토마토> 지면에는 매주 화요일자 23면에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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