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재벌의 뿌리)④무너진 민족자본…GS·유한양행·동화약품만이 명맥 이어
백산상회 몰락에 독립자금도 끊겨…경주 최부자의 영남대는 박근혜 품으로
2015-11-18 07:00:00 2015-11-18 07:00:00
일제시대 연구자들은 우리나라 민족자본의 모델로 백산상회를 꼽는다. 백산상회는 경남 의령의 지주였던 백산 안희제(1885~1943)를 중심으로 설립됐다. 백산은 일찍부터 고향에서 계몽운동을 펼쳤으며,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침탈되자 독립운동에 헌신한다. 이를 위해 자금이 필요하다고 판단, 1914년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설립했다.
 
백산상회는 1918년 백산무역회사로 확대하고, 경상도 일대 지주와 자본가들의 도움으로 자금을 확충한다. 이때 참여한 인물들이 경주 최부자로 유명한 최준·최완 형제, 경남 양산의 대지주 윤현태 등이다. 백산은 1925년에는 중외일보를 인수해 운영하기도 했다. 
 
백산의 장손주인 안경하 옹(부산광복회 지부장)은 "할아버지는 1911년부터 3년간 중국과 연해주를 답사한 후 백산상회를 세웠다"며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에 가입하고, 1920년대에는 백산상회를 통해 상해 임시정부로 자금을 지원했다"고 말했다.
 
백산무역회사는 출범 7년 만에 내분 끝에 해산된다. 생산기반이 미흡했던 데다, 다수의 출자구조는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오미일 부산대 연구교수에 따르면 1920년대 민족자본의 뜻을 품고 상덕태상회(대구), 태궁상회(대구), 향산상회(경북 왜관), 원동상회(경남 마산), 대동상회(경북 영주) 등이 출범했으나, 결국 백산상회와 같은 길을 걷고 사라졌다.
 
◇1914년 설립된 백산상회
 
오 교수는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기업들은 일제 눈 밖에 나 정책 지원을 받지 못했고, 자본이 영세해 경쟁력도 약했다"고 말했다. 특히 "당시 부일 세력이 만든 기업과 지주들은 동양척식회사나 식산은행과 거래하며 충분한 자금을 지원 받았으나, 민족자본은 금융 통제까지 받아 경영에 어려움이 컸다"고 설명했다.
 
백산무역회사 설립 당시 참여한 주주 명단을 보면 경남 진주 출신의 지주  한 명이 눈에 띈다.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의 조부이자, GS그룹의 뿌리인 허만정(1897~1952)이다. 일반적으로 허만정은 6촌 동생 허만식의 사위인 구인회의 사업역량을 알아보고 락희화학공업사(지금의 LG)를 지원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20대의 나이에 백산무역회사에 출자한 것에서 드러나듯 허만정은 민족자본가의 길을 걸었다. 사재를 출연해 진주고·진주여고 설립을 도왔고, 중외일보 창립에도 관여했다.
 
허만정은 8명의 아들을 뒀다. 장남 허정구는 삼양통상 명예회장을, 차남 허학구는 새로닉스 회장을 지냈으며, 3남 허준구(GS그룹 창업주), 4남 허신구(GS리테일 명예회장), 5남 허완구(승산 회장), 6남 허승효(알토 회장), 7남 허승표(피플웍스 회장), 8남 허승조(GS리테일 부회장) 등이 모두 기업가로 현달했다.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3남 허준구의 아들이다.
 
'까스활명수'로 유명한 동화약품 역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궁중 선전관 민병호의 아들 민강(1883~1931)이 1897년 세운 동화약품은 한창 사업이 잘 되던 1920년대에 약을 팔아 남긴 돈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심지어 서울 중구 동화약품 본사는 상해 임시정부의 연락부였으며, 민강은 독립운동에 연루돼 두 번 옥고를 치른 끝에 48세의 젊은 나이에 숨졌다.
 
동화약품은 민강의 동지인 윤창식(1890~1963)이 인수했다. 정미업으로 사업에 뛰어든 윤창식은 조선인의 실력을 양성하자고 모인 조선산직장려계 결성을 주도했던 인물로, 항일운동단체인 신간회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윤창식의 아들이자 동화약품 회장을 지낸 윤광열(1924~2010) 역시 1940년대 말 일제에 강제 징집됐으나 탈영해 광복군에 입대한 이력을 지녔다.
 
유한양행을 세운 유일한(1895~1971) 박사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유일한은 14살에 조국 독립을 위해 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에 자원 입대할 정도로 애국심이 투철했다. 1926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 질병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의 보건을 위해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1942년에는 미국 LA에서 재미 한인들로 무장한 맹호군 창설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이에 반해 유일한의 동생 유명한(1908~1950)은 형과 달리 친일의 길을 걸었다. 유명한은 1938년 유한양행 이사, 1940년 부사장으로 일했고 태평양 전쟁을 즈음해 친일로 전향했다. 이름을 야나기하라 히로시로 창씨개명하고 국방헌금 1만원과 유한 애국기라는 이름의 비행기 1대 제작비 5만3000원까지 바쳤다. 이런 전력 탓에 유일한은 동생과 절연했으며, 유명한은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을 올렸다.
 
해방 후 지주 출신 자본가와 신흥 재벌이 득세한 것에 비해 민족자본가의 맥은 흥하지 못했다. 백산상회를 설립했던 안희제는 독립운동과 관련해 체포된 끝에 해방 2년여를 앞두고 숨졌다. 지주였던 안희제 집안은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 동화약품이나 유한양행도 재계를 주름잡는 재벌들에 비하면 영세하기는 마찬가지다.
 
백산상회에 출자했던 지주들의 후손들은 대부분 소식이 끊겼다. 일제시대에 활동한 다른 민족자본가들 역시 마찬가지다. 김두봉처럼 해방 후 북한으로 넘어간 경우도 있고, 박상진이나 서세충처럼 독립운동 중 사망한 사람들도 있다.
 
그나마 안희제와 협력한 경주 최부자 형제만이 세간에 알려진 정도다. 최준은 1947년 가산을 들여 대구대학(지금의 영남대)을 세웠다가 "한강 이남 최고의 대학을 만들겠다"던 이병철의 요청을 받자 금전적 보상은 거부한 채 삼성에 대학을 넘겼다. 하지만 이병철은 대구대를 박정희에 헌납, 이후 정수장학회가 대학의 주인이 됐다. 
 
민족자본가의 길을 택한 이들은 독립을 위해 과감히 가산을 포기했다. 일제와 적당히 타협하거나 협력한 이들과는 정반대의 삶으로, 이는 탄압을 의미했다. 안경하 옹은 "당시 백산 할아버지를 비롯한 동지들은 일제에 협력할 수 있었으나 시대적 소명의식을 택한 것 뿐"이라며 "가는 길이 달랐던 다른 지주들은 그들대로 사정이 있었겠거니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병호 기자 choib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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