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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표 "재벌 놔두고 노동자만 개혁? 저항 직면할 것"
"재벌 스스로 먼저 기득권 내려놓게 하는 리더십 필요"
"낙수효과 허구로 증명…소득주도성장으로 전환해야"
2015-09-22 08:48:32 2015-09-22 08:48:32
김진표 전 경제부총리(재정경제부 장관)는 두 분야의 부총리(경제·교육)와 청와대 정책기획수석비서관, 민주당 원내대표를 지낸 새정치민주연합 내 최고의 경제·정책전문가다. 지난해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낙선한 뒤로는 새정치연합 국정자문회의 의장과 아주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를 겸하고 있다.
 
특히 김 전 부총리는 새정치연합의 핵심 정책기조인 ‘소득주도성장론’의 고안자이기도 하다. 지난 16일 아주대 교수연구실에서 만난 김 전 부총리는 현 정부의 ‘부채주도성장론’을 강하게 비판했다. 또 국민의 소득이 소비와 기업의 성장, 다시 투자와 고용, 소득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경제정책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정치연합 문재인 대표가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약한 ‘경제민주화’도 우리나라의 장기저성장 극복을 위한 필수 과제다.
 
최근 화두인 노동시장 구조개혁에 대해서는 그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방식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내비쳤다. 그는 “일부 강성노조의 기득권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재벌의 기득권만 못하다”며 “그런데 재벌의 기득권을 건들지 않으면서 노동자의 기득권만 빼앗겠다? 이건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바람직한 개혁을 위해서는 가장 큰 기득권을 먼저 내려놓게 하는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것이 김 전 부총리의 소신이다.
 
-연일 한국경제 위기론이 나온다. 우리나라 경제를 어떻게 진단하고 있는지.
 
우선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은 지난 8년간 한 번도 잠재성장률인 4%를 넘지 못 했다. 문제는 추이다. 2000년 이후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 곡선이 ‘잃어버린 20년’이라 일컬어지는 1990년부터 2013년까지 일본의 경제성장률을 10년 시차로 따라가고 있다. 이건 우리의 경제성장률이 반등하지 못 하면 앞으로 10년간 일본의 전철을 밟게 된다는 소리다. 오히려 우리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일본은 2013년 기준 외국 기업이나 주식에 투자한 순자산이 3조달러로, 23년간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대외순자산이 마이너스다. 일본처럼 장기저성장을 버텨낼 힘이 없다. 우리나라는 지난 8년간 6번이나 분기 경제성장률이 0%대로 추락했는데,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경제가 개발도상국 수준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경제정책의 문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지난 8년간 우리나라의 경제정책 패러다임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수출대기업을 집중 지원하고, 부동산·건설경기를 회복시켜 내수시장을 활성화한다는 것이다. 이런 정책들을 보통 ‘부채주도성장’이라 일컫는다. 돈을 풀어서 대기업을 지원하면 투자가 늘어나고, 이것이 일자리와 가계소득, 내수소비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형적인 공급주의 경제학적 정책이다. 하지만 지난 8년간 투자와 고용, 노동소득분배율은 모두 하락했다. 대신 부채와 사내유보금이 급증하고 양극화는 더 심해졌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과 조셉 스티글리츠는 이구동성으로 낙수효과는 허구라고 지적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상위 20%의 소득이 1%포인트 늘면 경제성장률은 0.08% 하락하고, 하위 20%의 소득이 1%포인트 늘면 경제성장률이 0.38% 늘어난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IMF가 나서서 신자유주의를 반성한 것이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도 상위 소득자들의 소득을 늘려주는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대기업의 성장이 선순환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여기에는 우리나라 기업들의 특수성이 존재한다. 우선 우리는 선도형 투자보단 추격형 투자로 덩치를 키워왔다. 분단 후 기술력과 자본이 없는 상황에서 선진국 기업들이 성공한 것들만 베껴 투자하는 것만큼 효율적인 투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베낄 대상이 사라져버렸다. 초기 제철·조선 등 제조업의 성장에 힘입어 세계 점유율 1위를 다투는 상품도 늘어났다. 그런데 최근에는 중국의 추격과 ‘차이나겟돈’, ‘그렉시트’로 불리는 대외 변수로 수출 여건도 어렵다. 이제 우리 기업들도 원천기술을 개발하고, 연구개발(R&D) 투자를 늘리는 선도형 투자가 필요한 시점에 직면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기업들은 실패를 두려워한다. 이런 상황에 대통령이 기업 총수들을 청와대로 불러 아무리 투자를 압박해봐야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다. 두 번째 요인은 기업 문화다. 정주영·이병철 회장 등 창업 1세대는 가진 게 없었기 때문에 공격적인 투자가 가능했다. 반면 3~4세대로 내려오면 태어날 때부터 엄청난 자산가다. 잃을 게 많기 때문에 ‘리스트 테이커’보다는 ‘리스트 매니저’의 역할에 안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성장기조를 탈피하고, 기업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한 대안은 무엇이라 보는지.
 
우선 부채주도성장에서 소득주도성장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10대 재벌에 속하는 상위 1%의 소득이 늘어도, 나머지 99%의 소득이 감소하면 전체 소비는 줄어든다. 그래서 99%의 소득을 늘리고, 이것이 소비, 투자, 고용, 다시 소득으로 이어지게 하자는 것이다. 정부는 이 선순환의 시작점으로 투자를 삼으려고 하지만 그건 지난 8년간 해봤다. 나는 30년 이상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투자의 중요성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앞서 말했듯 기업들이 바뀐 여건에 적응하지 않고서는 정부가 아무리 지원해봐야 투자가 늘어나지 않는다. 그동안 기업들은 충분히 벌었다. 이제 임금을 올리고, 고용을 늘리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법인세를 정상화하는 방식으로 그동안 기업들이 쌓아놓기만 한 돈을 가계로 옮겨야 한다. 두 번째는 경제민주화다. 현대차는 한전부지를 무리하게 매입하면서 4~5조원의 주주 이익을 침해했다. 또 상당수의 기업이 선도형 투자를 꺼리면서 ‘안정적인’ 골목상권에 침투하고 있다. 이건 총수 1인에게 모든 의사결정권이 집중됐기에 가능한 일이다. 지금처럼 비정상적인 의사결정구조와 ‘관료화한’ 기업문화를 개혁하지 않고서는 기업도 성장하기 어렵다. 대신 정부가 해외 유수기업을 끌어들이고, R&D 투자를 지원해주는 방식으로 선도형 투자를 유도해야 한다.
 
-소득주도성장을 언급했는데, 구체적인 정책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지
 
하나만 소개하자면 선진국에서는 한 나라 일자리의 4분의 1 정도가 정부 고용직이다.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거나 경제적인 이유로 시장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사람들을 정부가 대신 고용해주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나라에는 고학력 경력단절주부나 건강한 고학력 노인 등 ‘고급 실업자’가 많다. 정부가 이런 사람들을 월급 100만원을 주고 고용한다면 연간 1조2000억원으로 10만명을 고용할 수 있다. 효과를 보자. 전업주부나 노인이 어린이집 보조교사로 일한다면 우선 아동학대가 줄어들 것이다. 수백억 원을 들여 CCTV를 달 필요가 없어진다. 또 이 사람들에게 소득이 생기기 때문에 소비도 그만큼 늘어난다. 여기에 저임금 중노동에 시달리는 보육교사들의 삶의 질이 높아질 수 있다. 정부가 지난 8년간 깎아준 법인세가 120조원이다. 이걸 매년 1%씩 회수하면 100년 동안 매년 10만명을 고용할 수 있는 예산이 생긴다.
 
-다른 얘기지만 최근 최대 경제 이슈는 노동개혁이다. 정부의 노동개혁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노동개혁의 취지에는 공감한다. 모 기업은 노동자 평균연령이 49세에 달해 연공서열에 따른 인건비 부담이 높다. 더욱이 이 기업에서는 신규채용, 인사발령 등 경영활동에도 노조의 동의가 필요하다. 이런 문화는 분명 기업의 신규투자와 고용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문제는 방법이다. 일부 강성노조의 기득권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재벌의 기득권만 못하다. 그런데 재벌의 기득권을 건들지 않으면서 노동자의 기득권만 빼앗겠다? 이건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기업 스스로 기득권을 내려놓게 만드는 정치적 리더십이 선행돼야 한다. 개혁안의 내용도 다소 아쉽다. 최소한 상시·지속적 업무에 대해서는 비정규직 채용을 제한해야 한다. 인건비 절감을 위한 비정규직 확대는 지양해야 하는데, 그런 부분들에 대한 대책이 미흡하다.
 
김지영 기자 jiyeong8506@etomato.com
 
김진표 전 경제부총리가 지난 16일 아주대 교수연구실에서 뉴스토마토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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