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가 후려치기와 함께 대기업의 대표적 갑을 횡포로 지적돼 온 기술 탈취와 인력 빼가기가 여전한 가운데, 그 방법 또한 교묘하게 진화되고 있다.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기술자료 임치제도와 핵심인력성과보상금제, 기술보호 지원업무 등 다양한 대책들을 쏟아내고 있지만 사실상 속수무책이다.
◇대기업, 특허제도 악용하다
대기업은 그간 중소기업의 기술을 손에 쥐기 위해 내부 인력을 매수해 기술자료를 빼내거나, 납품을 조건으로 기술자료를 요구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중소기업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기술에 대한 공동특허를 요구하거나, 법적 분쟁이 최소화될 수 있는 방식으로 그 수법을 변화시키고 있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의 공동특허 요구를 거절할 경우, 대기업은 원천기술을 둘러싼 사이드 보호기술 특허들을 대상으로 특허무효 소송을 진행, 본 특허도 무력화시키는 전략을 전개하는 등 대기업의 기술 탈취가 나날이 지능화되는 추세다. 부실 특허를 방지하고 선행 특허에 대한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도입된 특허무효 소송이 대기업에게는 중소기업이 어렵게 출원한 특허기술을 무력화시키는 용도로 악용되고 있는 셈이다.
원혜영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실에 따르면, 우리나라 특허심판원의 특허무효심판 인용률은 2014년 기준 53.2%로, 미국과 영국, 중국, 일본 등에 비해 현저하게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또한 취하된 소송을 포함한 수치로, 이를 제외하면 60%를 훌쩍 넘는다. 특허청은 이에 대해 "특허무효심판 인용률이 주요국에 비해 다소 높은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특허분쟁을 벌여도 대기업의 승소율이 70%에 달하는 등 싸움 자체가 중소기업으로서는 버겁다. 대기업을 상대로 한 중소기업의 특허권 분쟁 승소율은 지난 2008년 55.5%에서 2013년 36.6%로 크게 떨어졌다.
특허를 피하기 위한 우회 기술 활용은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 탈취 수단의 대표적 사례로까지 꼽힌다. 특허 제도 자체가 출원과 동시에 핵심 기술의 주요 내용이 공개되는 탓에 경쟁업체나 대기업이 교묘하게 변형할 경우 새로운 특허 출원의 길도 어렵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특허로 등록된 기술의 소재나 구현방법 등을 달리해 특허 침해를 피할 수도 있다.
◇손쉬운 특허 무효…특허법 개정안, 누구를 위한 개정인가
최근 산업통상자원부에서 논의되고 있는 특허법 개정안에는 대기업이 중소기업 특허를 취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는 '특허무효소송'의 간편화를 추진하는 내용들이 담겨있어 논란이 커지고 있다. 가뜩이나 특허심판원의 특허무효심판 인용률이 높은 상황에서 이 같은 개정안이 법제화될 경우 대기업이 손쉽게 중소기업의 특허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게 반대 근거다.
특히 특허무효 소송에 휩싸일 경우 재정이 열악한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법적 분쟁에 대한 비용을 감당키 어려워 특허가 무효화되더라도 항소를 하기 어렵다. 기나긴 싸움은 해당 중소기업의 역량을 분산시키는 등 영업에도 심대한 차질을 빚게 할 수 있다. 이번 개정안이 대기업을 위한 특혜로까지 비치는 이유다.
동반성장위원회 관계자들은 "중소기업의 경우 자금력과 인력이 취약해 대기업과 기술 탈취 소송을 벌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특허 분쟁시 1심에만 10억원 이상의 비용이 들어가는 까닭에 실제 분쟁까지 벌이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말했다.
정병일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특허 무효의 간편화는 보는 시각에 따라 중소기업에, 대기업에 유리할 수도 있다"며 "다만 특허 분쟁에서 중소기업의 승소율이 확연히 떨어지고, 중소기업들 상당수가 소송비용에 부담을 느끼는 우리나라 사정에서는 대기업에 유리한 법 개정안"이라고 지적했다.
◇인력 유출에도 무방비
아이디어로 승부를 보는 벤처기업 등은 특허 분쟁보다 인력으로 인한 기술유출 문제가 더 심각하다. 중소기업청과 국가정보원 산업기밀보호센터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최근 5년간 발생한 중소기업 기술유출 건에 대한 경로는 전·현직 임직원이 80%를 상회할 정도로 절대적이다.
자금력을 앞세운 대기업들이 기술력을 갖춘 중소기업 핵심 인력들에게 고액의 연봉과 함께 이직을 제안할 경우, 이는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 된다. 해당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기껏 인력들을 키워놓으면 대기업이 가로채는 악순환이다. 무엇보다 대기업의 인력 빼가기로 핵심 분야에 대한 인력난과 함께 그로 인한 기술유출 문제도 더해지면서 중소기업의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난다는 게 중소기업계 설명이다.
그럼에도 중소·벤처기업들은 뚜렷한 대책이 없어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다. 연봉 등 현실적 조건에 있어 대기업과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중소기업이 무작정 이들을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동반성장위원회 산하에 기술인력 유출 신고센터가 마련됐다고는 하나 동반위 자체가 민간기구로 법적 제재 수단이 전무한 데다, 직업 선택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활용 범위가 크지 않다. 중소기업청이 내놓은 핵심인력성과보상금(내일채움공제) 또한 대기업과 비교해 근무조건이 열악한 중소기업들에게는 실효성 있는 대책으로 다가가기에는 한계가 많다는 지적이다.
◇알맹이는 빠졌다…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 절실
중소기업중앙회가 최근 500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진행한 특허 관련 실태 조사에서 응답자의 26.4%는 "대기업의 특허 침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징벌적 손해배상' 도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피해 중소기업의 손해배상액 산정을 위한 증거자료와 특허 침해를 입증하기 위해 대기업의 자료 제출을 강제하는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역시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란 민사 재판에서 가해자의 행위가 악의적이고 반사회적일 경우 실제 손해액보다 훨씬 더 많은 손해배상을 강제하는 제도다. 지난해 발표된 충남대 대덕특허정책연구소 윤기승 연구원의 '특허법상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에 관한 연구' 논문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특허 침해와 관련한 소송에서 판결된 손해배상액은 평균 7800만원에 불과했다. 반면 특허 침해에 엄격한 미국의 경우, 같은 기간 이뤄진 손해배상 평균 금액은 102억원에 이른다.
이 같은 차이는 미국이 특허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정책을 채택해 악의적 특허 침해자들로부터 특허를 보호하고 이를 어길 경우 징벌적인 손해배상을 명령할 수 있도록 한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검증 가능한 최소한의 실질적 손해배상액만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허권자에 대한 과도한 입증 책임도 논란거리다. 현행 특허법에는 특허권자가 손해배상을 받기 위해서는 손해액을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이를 해결키 위한 방안으로 디스커버리 제도가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국회에서도 이 같은 주장을 받아들여 원혜영 의원이 지난 2월 징벌적 손해배상과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을 골자로 하는 특허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7월 산업통상자원위원회 회의 과정에서 대안 반영 폐기됐다. 원 의원실은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 도입과 관련해 상임위 회의 과정에서 찬반 논쟁이 심했다.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많아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며 "대신 우선적으로라도 대기업의 자료 제출을 의무화하는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을 추진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계가 염원했던 근본적인 대안은 여전이 미결과제로 남아있다.
김상우 기자 theexod@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