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史, 혼사(婚事)가 썼다
권력이동 따라 정권에서 자본으로…관·법조·언론도 한 축
부의 집중과 기득권 재생산…"봉건적 계급사회의 현대판"
입력 : 2015-05-12 10:00:00 수정 : 2015-05-12 10:16:17
재벌을 이해하는 데 있어 ‘혼맥’만큼 유효한 접근방법은 찾기 어렵다. 혼맥은 우리나라 특유의 혈연주의와 맞물려 재벌집단을 지탱하는 방편이 돼 왔다.
 
60·70년대 정치권력을 시작으로 재벌가 혼맥은 점차 관료, 법조, 언론 등으로 결탁의 끈을 이어간다. 90년대 이후에는 재계 내에서의 혼사가 활발해졌다. 권력의 중심이 정치에서 자본으로 이동하면서다.
 
이처럼 시대상황과 권력이동에 따라 재벌의 혼맥도 방향성을 달리 했다. 지극히 폐쇄적인 기득권 구조는 얽히고설킨 혼맥의 부산물로 남았다.
 
◇재벌 성장의 주요 수단 '혼맥'
 
최정표 건국대 교수는 그의 저서 <한국재벌사연구>(2014·해남)에서 국내 재벌기업 지속성의 핵심으로 “혼맥을 통한 혈연주의”를 꼽았다. 힘 있는 가문끼리 혼사로 가족의 연을 맺는 폐쇄적 혈연주의는 재벌집단 카르텔의 원천적 배경이자, 보이지 않는 장벽이 된다.
 
2004년 참여연대와 함께 3년에 걸쳐 <한국의 30대 재벌 혼맥도>를 그려낸 김진방 인하대 교수는 혼인을 재벌 성장의 주요한 '수단'으로 봤다. 그는 “60·70년대 정부 주도의 경제계발계획과 함께 은행(금융)을 통한 관치경제 체제에서 재벌은 해외차관과 사업권을 배정하는 정권과 밀착할 수밖에 없었다. 밀착은 주로 혼인을 통해 이뤄졌고, 이는 정경유착의 배경이 됐다”고 설명했다.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는 “혼인이라는 혈연적 연결고리를 통해 정경유착의 특혜 속으로 재벌들이 들어갔고, 이는 재벌의 압축적 성장 밑바탕이 됐다”고 말했다. 박주근 CEO스코어 대표도 “군사정권 시절 재벌가의 혼맥도를 보면 권력층과의 혼사가 두드러진다”며 “기업하는 사람들이 가장 믿는 혈연으로 묶였다”고 분석했다.
 
비단 정치권력만이 유착의 대상이 아니었다. 조선·중앙·동아 등 힘있는 족벌언론은 물론 관, 법조, 재계 등도 혼인으로 얽혔다. 90년대 이후에는 재계 내에서의 혼인이 주를 이뤘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자본이 (힘의) 우위에 서게 되면서 정치권력은 유착의 대상에서 관리의 대상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사외이사제도 등을 악용해 정권 핵심부에게 일자리를 건네고 방패막이로 활용했다. 언론에는 광고가 관리수단이다.
 
박 대표도 “3세를 기점으로 정치나 관이 아닌 재계와의 혼맥이 눈에 띈다”며 “이전까지는 정치권력의 힘이 필요했지만, 이제 더 이상 특혜 등을 기대할 수 없게 되면서 재벌끼리의 유대에 초점이 맞춰졌다”고 말했다.
 
◇재벌가 혼맥도…폐쇄적 혈연주의로 기득권 재생산 
 
<뉴스토마토>는 김 교수의 자문을 얻어 두 달여에 걸쳐 10대 그룹을 중심으로 재벌가의 혼맥도를 새롭게 그렸다. 김 교수 팀의 연구결과를 기초자료로 활용하고, 변동사항들을 추가했다.(표 참조)
 
 
재벌-정권-언론까지 복잡하게 엮인 사례는 삼성이 대표적이다.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장남 맹희씨는 손영기 전 경기지사의 딸 복남씨와 결혼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이들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 회장의 장녀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은 영남 대지주의 아들인 조운해 전 고려병원 이사장과 결혼했다. 차녀 숙희씨는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동생인 구자학 아워홈 회장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삼성과 LG(옛 금성)의 혼사였지만 삼성이 전자사업에 진출하면서 양가의 인연도 사실상 끊겼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홍라희 현 리움미술관장과 결혼했다. 홍 관장은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누나로, 홍 회장의 부인은 신직수 전 중앙정보부장의 딸 연균씨다. 이건희 회장의 누이 이맹희 신세계그룹 회장은 사업가이자 정치가인 정상희 전 의원의 아들 재은씨와 결혼했다.
 
정치, 재계, 언론을 망라한 1세대의 혼맥은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이건희 회장의 장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임창욱 대상그룹 명예회장의 장녀 세령씨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가 이혼했다. 세령씨의 모친은 박인천 금호그룹 창업주의 삼녀 현주씨로,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여동생이다.
 
이 회장의 차녀 서현씨는 김병관 전 동아일보 회장의 차남 재열씨와 결혼했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은 배우 고현정씨와 이혼하고 한상범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딸 지희씨와 재혼했다. 정 부회장의 동생 유경씨는 문청 전 KBS 보도본부장의 아들 성욱씨와 결혼했다.
 
재벌과 정권, 언론과의 혼맥은 타 그룹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의 장남 준오씨는 GS가문의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회장 장녀 유정씨와 결혼했다. 준오씨의 장모는 정몽준 전 의원의 장인인 김동조 전 외교부 장관의 셋째 딸 영명씨다.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도 한화그룹과 혼맥으로 얽힌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들 재용씨와 이혼한 경아씨는 박태준 포스코 회장의 넷째 딸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최종현 SK그룹 전 회장 또한 딸(소영씨)과 아들(최태원 회장)의 혼사로 결합한 사돈이다. 중견그룹에 불과했던 SK는 이 혼사를 통해 우리나라 통신재벌로 등장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셋째 딸 수연씨는 조현범 한국타이어 사장과 결혼했다. 조 사장의 부친은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으로, 조 회장은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의 동생이다. 횡령 및 외환거래법 위반 등의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던 조석래 회장의 장남 조현준 사장은 이명박 대통령 임기 말 재벌가의 일원으로는 유일하게 특별 사면됐다.
 
◇재벌의 나라…봉건적 계급사회 판박이
 
이는 부의 집중, 기득권의 재생산으로 이어졌다. 박원석 정의당 의원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중 자산상위 10대 재벌그룹(공기업 제외)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자산은 48.4%에서 84%로, 매출액은 50.6%에서 84.1%로 급증했다. 10대 재벌그룹이 곧 한국경제의 전부다.
 
또 지난 2월 기준 국내 100대 주식부자 가운데 상속형은 75명인 데 반해, 자수성가형은 25명에 그쳤다. 특히 지분가치가 1조원이 넘는 주식부호 가운데 무려 18명이 재벌가 출신으로, 남은 2명마저도 이해진, 김범수 등 전통적 재벌가문이 취약한 신흥 IT 강호로 채워졌다.
이에 대해 박 대표는 “재벌사회가 부조화되고 고착화되면서 재벌로의 진입장벽도 높아졌다”고 말했다. 특히 전통적 재벌 영역에서는 신규 주자들의 이름을 찾기 어렵다.
 
정 대표는 김선홍 전 기아차 회장, 강덕수 전 STX 회장 등 쓰러진 창업가를 예시하며 “전통 재벌가의 사람이었다면 이처럼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호세력이 취약함에 따라 불법 로비자금 등을 마련하고, 이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많다는 게 그의 부연이다.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은 국가별 부패 유형을 4가지로 분류한 마이클 존스턴 교수의 연구결과를 들며, 우리나라가 ‘엘리트 카르텔 부패’의 전형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정치인과 고위 관료, 재벌 등이 혼인 등 인맥으로 얽힌 권력형 부패 사회를 뜻한다. 위평량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은 한발 더 나아가 “혼맥으로부터 시작된 재벌들의 카르텔이 한국사회를 500년 전 봉건적 계급사회로 되돌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기성·김영택·김동훈 기자 kisung0123@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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