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보라·이준영 기자] 초여름 충무로 대한극장 인근 인쇄거리는 한산했다.
삼발이(짐수레를 연결한 오토바이)가 인쇄물을 잔뜩 싣고 어디론가 움직인다. 가끔 지나다니는 오토바이는 거리의 행인을 제치고 달아났다. 문을 열어둔 공장에서 새어나온 잉크와 휘발유 냄새로 조금 어지럽다. 주로 2-3층 이하의 금이 가고 잉크로 얼룩진 담벼락들을 사이에 두고 여러 영세인쇄업체가 옹기종기 모여있다.
서울시 중구에는 소규모 인쇄업체들이 5400여개(중구청 추산)에 이른다. 기획사와 재단소 등 관련산업까지 포함하면 약 1만5000여개 업체들이 충무로와 필동, 을지로 일대에 밀집해있다. 공장에 들어가자 공간을 가득 채운 기계가 큰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있다. 검은색으로만 인쇄하는 1도 인쇄기. 인쇄기계에 설치된 벨트위로 종이들이 빠르게 움직인다. 인쇄가 제대로 진행되는지 점검하고 어루만지는 기술자의 손놀림이 바쁘다.
◇인쇄거리에 삼발이가 주차되어 있다. (사진=이보라 기자)
◇인쇄단가, 20년째 그대로.. 업체간 양극화 '심화'
"재작년 5월부터 집에 돈 한 번 못 갖다줫어요. 원래 200만원 정도씩 갖다줬거든요. 장사가 안되서…. 그래도 애들은 다 키워놨고, 와이프가 나보다 잘 벌어서 다행이지."
인쇄업종 역시 2-3년전부터 이어진 내수 침체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온갖 판촉물과 택배 박스, 포장박스 등이 많아지고 있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인쇄영세업체들은 일감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씁쓸하면서도 공허한 눈빛으로 한 기술자가 말했다.
"작년에 비해 한 30% 줄어든 것 같아요. 일이 없어서 가만히 앉아 있을 때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
일감은 줄어들고 있지만 인쇄단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제자리걸음이다. 20년여년전에는 한가지색으로 1000장을 인쇄해 6000원을 받았다. 지금은 7000원 가량. 같은 시기 월급은 8만원 가량이었지만 현재 이 업계의 초봉은 150만원 정도다.
이유는 분명하다. 인쇄기계가 날이 갈수록 첨단화되고 고사양화되면서 생산성이 높아진 것.
예전에는 인쇄기계 다섯 번을 돌려 1000장을 뽑아냈다면 이제는 한번만 돌려도 1000장을 뽑을 수 있는 기계가 개발됐다. 최신·고사양 기계로 갈수록 효율이 높아진다는 얘기가 된다.
최신기계를 사용할수록, 신수요, 대량 수요에 대응할 수 있다. 반면 기계가 오래되고 효율이 떨어질수록 시장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단가가 낮은 일감만 손에 쥐게 된다. 오래된 기계를 가진 영세업체가 현재의 규모를 벗어날 수 없는 구조인 셈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영세업체는 경쟁에서 뒤쳐지고, 대형업체가 득세하고 있다. 인쇄거리는 재편되고 있다.
◇인쇄기계는 최소 억원대에서 몇십억원대까지 호가한다. 대부분 일제나 독일산이 많다,(사진=이보라 기자)
인쇄기기의 대부분은 최소 억원대에서 몇십억원대에 달할만큼 비싸다. 국내 내수시장은 그 규모가 작아 인쇄기계산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인쇄선진국인 독일이나 일본산 인쇄기계가 유명하다. 기계를 사려고 해도 신용보증기금이나 중구청의 정책자금으로 감당할 수 없다. 대부분 은행대출을 이용한다. 한 기술자는 "기계의 효율을 어느 정도 몸으로 때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몸은 계속 힘들어지지만"이라며 고개를 떨궜다.
"리스보다는 직접 대출을 받아서 사죠. 환율 문제로 고생하는 사례를 많이 봐서 리스는 절대 하지 않아요. 3년거치, 4년 상환으로 7억원짜리 기계를 구입했어요. 한달에 1500만원 기계값 내고, 월세 내고, 이러다보면 제가 가져가는 건 얼마 안돼요."
◇임대료 비싸도 '살기' 위해 버틴다
서울 중심가에 위치한 탓에 임대료도 만만치 않은 부담으로 작용한다. 중구 마른내로에서 인쇄소를 운영하는 김인호 동양상사지기인쇄 대표 역시 내 공장에서 일해보는 게 꿈이라고 했다. 대한교과서(옛 국정교과서)에서 일하다 나와 20여년 전 공장을 차린 김 대표는 제약회사에 포장 패키지를 공급하며 꾸준한 수익을 내고 있지만 그에게도 '내 공장'을 갖기란 어려운 일이다.
"가게를 운영한지 20년이나됐지만 아직도 세 들어살고 있어요. 임대료만 해도 한달에 700만원을 내죠. 건물관리까지 제가 도맡아 하고 있어요."
건물 임대료가 비싼데도 이들이 굳이 모여있는 것은 바로 '협업'하기 위해서다. 인쇄업은 한 업체에서 모든 공정을 도맡아 할 수 없다. 기업으로부터 인쇄주문을 받는 기획사, 종이를 자르는 재단소, 인쇄소, 코팅업체 등 여러 공정이 분업화되어 있다. 서로 가까운데 위치해 '협업' 함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영세업체가 그나마 조금의 일꺼리라도 확보하려면 이 동네에 머물러야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비싼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이곳에서 나간 업체도 부지기수다. 외곽으로 나가면 주문을 받기도 어렵고 끝내는 문을 닫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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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없는 사람에게는 장기 시프트 주택 같은 것을 주면서 우리 같은 인쇄종주국의 소공인들에게 왜 아파트형 공장 같은 것을 제공하지 못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되요. 왜 우리는 이렇게 소외되어야 하나요? 인쇄라는 게 없어서는 안되잖아요?"
◇인쇄거리에 신속한 배달을 위한 오토바이들이 주차되어 있다.(사진=이보라 기자)
개발하면 밀려 나가는 식으로 업체 하나 둘씩 없어진다면 결국 인쇄업종의 경쟁력 역시 상실하고 말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 속에 이들은 오늘도 기계를 돌린다. 하지만 아파트형 공장이 주어진다 해도 임대료가 높은 민간형 공장은 입주가 어렵다. 반드시 정부가 지원하는 식의, 영세업자도 충분히 세를 낼 수 있는 규모의 아파트형 공장이 절실하다는 입장이다.
벽면에는 잔뜩 묻은 잉크가 그간의 세월을 말해준다. 더러워 옷에 묻으니 옆에 오지 말라는 한 기술자의 경고. 곧 자기 몸집보다 몇 배 더 큰 인쇄기계의 이쪽 저쪽을 재빠르게 움직이면서 기계와 인쇄상태를 계속 확인했다. 손에는 약간의 잉크와 기름이 묻어있었다. 몸을 많이 움직인다고 했다.
역시 인쇄를 새로 배우려는 사람도 거의 없는 상태다.
"식당이나 카페에서 알바하는 애들 있잖아요. 젊을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요즘 이들을 가만히 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저 시간에 기술을 배우면 좋을텐데. 정년도 없는 직업인데…."
◇'블랙홀'처럼 주문량 흡수해가는 '합판업체'
대형업체에 밀리는 이유가 최신 기계 탓이라면 '비싼'기계를 갖추면 어찌 해볼 수 있을지 모른다. 이들에게 더 큰 문제는 10여년전부터 생겨난 일부 합판인쇄 업체가 전국의 인쇄물량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문에 대형업체나 영세업체 할 것 없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합판인쇄란 판 하나에 명함과 전단지 등 여러가지를 한번에 올려놓고 인쇄하는 방식으로 하나 하나씩 인쇄하는 것에 비해 인쇄단가가 매우 저렴하다. 한 판에 여러개를 놓을만큼 주문량이 많아야 가능하다. 전국의 소비자들로부터 인터넷을 통해 주문을 받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영세업체들은 혼자만의 힘으로 단가를 떨어뜨릴만한 대량의 주문을 확보하지 못한다.
중구의 인쇄업자들은 이들이 '블랙홀'처럼 전국의 주문량을 흡수해 인쇄시장을 교란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공장 안 인쇄기기 옆벽면이 잉크로 도배되어 있다.(사진=이보라 기자)
"처음엔 미미했죠. 하지만 이제 이들의 규모가 커져서 명함이나 전단지 같은 소규모 인쇄나 1인 인쇄업체들이 다 죽었어요. 대응할 수 없는 차원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규모는)커지는데 고용창출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일반 인쇄업체와 합판인쇄업체의 가격경쟁력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난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원가의 차이'라고 이들은 입을 모았다.
이런 합판업체의 대량 인쇄로 인해 이 일대의 1인 혹은 영세 인쇄업체가 이들의 하청업체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도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또 여러 종류의 인쇄물을 한 번에 인쇄하기 때문에 질이 낮고, 때에 따라 규격이나 정량에 맞지 않는 용지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소비자는 알 수 없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좋죠. 싸게 가져가니까요. 하지만 결국 나중이 문제에요. 이런 업체 때문에 인쇄거리의 기반이 무너지면 결국 소비자들을 상대로 가격을 올리지 않겠어요?"
◇계약서 없는 '계약' 관행
대한극장 맞은편. 4평 남짓한 공간에서 인쇄기획사를 운영하는 한 업자가 갑자기 인쇄기계 위에 있는 책장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7년여전의 잡지를 하나 꺼내더니 한 건축회사 대표의 인터뷰 기사를 가리켰다. 사업주가 기독교임을 짐작할 수 있는 건축회사 이름.
"돈 떼어먹는 경우요? 흔하디 흔하죠. 난 이 사람한테 1400만원어치 못 받았어요. 교인이라는 사람이 그래요. 그 뒤로 몇번 찾아가서 준다는 약속도 받아냈는데 결국 못받았어. 법인이 파산하면 받아낼 길이 없더라고."
◇인쇄기기 옆에 잉크 묻은 장갑과 헝겊들이 놓여있다.(사진=이보라 기자)
인쇄업체는 큰 액수의 거래보다는 만원대, 십만원대 등 소액의 거래가 많다. 5만원에서 1억원까지 그 범위가 다양하다. 대부분의 업체가 따로 계약서를 쓰지 않고 주문을 받아 그때그때 납품하고 결제는 한꺼번에 모아서 한다. 한 식당을 정해두고 한 달동안 점심을 먹고 한꺼번에 결제하는 식과 마찬가지다. 거래처가 갑자기 부도가 나거나 잠적하면 어쩔 도리가 없다.
"한번은 하도 답답해서 돈 받아준다는 업체에게 일을 맡겨봤어요. 근데 상대방이 전화를 해선 '날 뭘로 보고 그러냐'며, 당장 주겠다'고 하더군요. 괜히 저에 대한 이미지만 나빠졌죠. 돈요? 또 안주던데요."
이런 관행 탓에 이 거리에는 '돈 받아드립니다' 라는 식의 심부름대행업체의 광고문구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만큼 돈을 떼이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개인적으로 소송비용을 들여 법적 대응을 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스스로 조심해야한다. 신뢰가 없는 거래처와 거래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예방책이다.
몇 년간 거래해온 상대방에게 사기를 당해 속상할 때도 있지만 보람을 느낄 때도 있다.기획사를 통하지 않고 직접 찾아와서 포스터 같은 홍보물을 인쇄해간 소비자들이 트위터 등의 SNS를 통해 가게를 소개해 손님들이 찾아오는 경우다.
"우리가 영업직원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컴퓨터에 소개해주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나 고맙죠. 이런 사람들한테 최대한 잘해주려고 노력해요. 정말 고마워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이 거리 업체의 대부분은 라디오나 음악을 틀어놓고 일하고 있다. 오후 나른한 시간 남녀가 활기찬 목소리로 진행하는 오후의 한 라디오 쇼만이 유일하게 웃음을 선사한다.
"예전에는 꿈이라는 게 있었어요. 열심히 일해서 다른 기계를 사고 규모를 늘려가고 하는 이런 꿈을 계속 키워왔어요. 하지만 지금은 꿈이 없어요. 그냥 지금 상태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에요."
인쇄거리의 한 업주가 말했다.
규모의 경제로 영세업체를 밀어붙이는 합판업체를 비롯한 대형업체들의 각축전 속에서 영세인쇄업체들은 희망을 잃은지 오래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다윗이 이기는 길은 요원해 보인다. (끝)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고재인 자본시장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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