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공화국)②그들이 '죽음의 작업장'으로 향하는 이유
비용절감 위해 ‘남의 목숨’ 건 원청, 사문화된 작업중지권
“하청업체 노동자 사망 제도적 배경은 최저가 낙찰제”
2013-05-24 11:41:27 2013-05-24 11:44:10
[뉴스토마토 황민규기자] 최근 빈발하고 있는 유해화학물질 누출사고의 배경에는 안전관리 문제를 외주화한 대기업의 무분별한 이윤 추구, 그리고 안전보다는 ‘비용절감’에 매진할 수밖에 없는 하청업체의 지위, 이른바 '을의 비애(悲哀)'가 도사리고 있다.
 
정부는 뒤늦게나마 지난 21일 원청업체에 대한 책임 강화하는 산업안전법 개정 추진에 나섰지만, 전통적인 '갑을' 관계의 속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보여주기식’ 대책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사고 발생 시 원청업체의 책임을 강화한다고 하더라도 하청업체가 목숨을 내놓고 현장에 투입되는 현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전남 여수산업단지 내 석유화학제품 생산공장 근로자들이 작업장에 투입되기 전에 안전교육을 받고 있다(사진제공=여수지역 건설노동조합)
 
◇원청업체 비용절감 쥐어짜기..‘작업중지권’ 보장 안돼
 
통상 대기업이 유해화학물질 관리와 관련한 업무를 협력업체에게 위임하는 방식은 '최저가 낙찰제'다. 실제 업체 선정 과정에서 '안정성'을 평가 항목에 넣는 기업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컨설팅회사 써스틴베스트에 따르면 국내 주요 상장사 가운데 약 6%만이 하청업체를 선정할 때 안전보건상 위험관리 능력을 평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 가운데 수주 실적을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최저가에 일을 떠맡은 하청업체는 각종 비용을 쥐어짜며 유지·보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상당수 업체들은 임금체불 등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다. 이렇다보니 소수의 인원이 각종 보수작업, 야간작업 등에 투입되는 일이 잦을 수밖에 없다.
 
정도영 여수지역 건설노조 노동안전국장은 "하청업체 입장에서는 연간 공사실적이 중요한만큼 저가 수주라 해도 최대한 많은 공사를 따기 위해 근로 조건과 관계없이 수주에 목을 맨다"며 "그만큼 노동자 입장에서 일은 많아지고 위험도는 상승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전문가들은 삼성전자, 구미, 여수 등에서의 잇단 사망사고가 단 한 가지 법만 준수됐어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바로 산업안전보건법 26조 '작업중지권'이다. 산안법 26조에 따르면 '노동자 스스로가 급박한 상황일 때는 스스로 작업을 중지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라고 규정돼 있다.
 
작업중지권은 '원청업체의 책임 소재'도 명확하게 적시하고 있다. 법안에 따르면 사업주는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을 때 또는 중대재해가 발생하였을 때는 즉시 작업을 중지시키고 근로자를 작업장소로부터 대피시키는 등 필요한 안전·보건상의 조치를 한 후 작업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문제는 현장에서 법이 지켜진 사례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하청업체들 사이에서 작업중지권은 통상 원청업체 또는 관리자들이 시행하는 제도로 알려져 있다. 법은 노동자가 직접 작업을 중지할 수 있는 권한을 갖도록 돼 있으나 고용 문제나 법적 문제(하청업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까지 감수하면서 작업중지권을 스스로 행사할 수 있는 업체는 사실상 없다는 게 업계의 일반적 시각이다.
 
심지어는 정부조차도 '위험의 하청화' 문제에서 그리 자유롭지 않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9월 구미 불산 누출사고 당시 가장 먼저 현장에 투입된 환경부 출동팀조차 6명 중 5명이 비정규직이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위험 부담이 높은 작업을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전거하는 관습은 기업뿐만 아니라 정부, 공공기관에도 널리 퍼져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안전사고 불 보듯 뻔해도 하청업체 작업 투입..왜?
 
"다들 위험할 것 같으면 작업하지 말라고 얘기는 하지만 막상 위험한 상황이 되도 작업을 거부할 수 있는 상황은 없다고 보면 된다. 언제 잘릴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작업을 지시하든 어떻게든 처리부터 하는 게 우선이다. 위험해서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본 적 없다." (H업체 현장작업 기사)
 
원청회사의 암묵적인 공사기간 단축 요구, 하청노동자의 불안한 고용구조도 산재사고를 키우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다.
 
지난해 폭발사고가 일어난 여수의 대림산업(000210)의 경우 공기단축을 위해 무리한 밤샘작업을 요구하다 참사를 빚었었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 3월 총 17명의 사상자를 낸 전남 여수 대림산업 화학공장 폭발사고 현장.(사진제공=여수지역 건설노동조합)
 
사고 발생 당시 현장에 투입됐던 이모(42세)씨는 "현장에 가기 전부터 사고가 나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며 "통상 작업지시가 내려오면 위험성을 판단하기 보다는 언제 끝낼 수 있느냐가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지난 1월 삼성전자 화성사업장 불산 누출 사고 당시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했던 STI서비스의 박모씨는 "(상황이) 위급했다"고 말했었다. 중앙화학물질공급시스템 건물의 저장탱크 내부에서 불산 유출 부위를 목격했을 당시 "임시로 막아 놓은 비닐봉지에 불산 액체가 넘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작업자 스스로도 작업의 위험성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위험 회피할 권리 있지만..감히 사용할 엄두 못내”
 
하지만 하청업체 근로자가 위험을 감수한 작업을 감행하는 관행은 대기업과 경찰 등 유관 기관 '작업자의 안전관리 미숙'을 탓하게 되는 명분으로 사용되고 있다. 삼성전자, 경찰 등은 화학물질 관련사고 때마다 현장 노동자의 과실 문제를 중점적으로 제기했다.
 
지난해 구미 불산 누출 사고 당시 경찰은 "근로자가 안전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고 안전보호 장구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발표했고, 삼성전자 또한 지난 1월 불산 누출사고로 사망한 박씨에 대해 "안전보호 장구를 갖추지 않고 불산에 노출돼 사망에 이르게 됐다"고 해명했었다.
 
이윤근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부소장은 "위험을 회피할 권리가 법에는 보장돼 있는데 감히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대림산업이나 삼성전자의 경우 작업자들이 위험을 인지하고도 작업을 한 이유는 기간 안에 빨리 끝내서 공장 가동이 되어야 원청업체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하청업체가 안전 문제로 작업을 중지했다가 원청업체로부터 손해배상 청구를 받은 사례도 종종 있다"고 덧붙였다.
 
고용노동부가 뒤늦게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이 또한 문제의 본질적 해결과는 거리가 멀다.
 
노동부는 지난 21일 이런 내용을 담은 '중대 화학사고 등 예방대책'을 발표해 원청업체가 하청 근로자에 대한 안전보건 조치를 위반할 경우 벌금을 강화하고 안전보건관리책임자의 범위를 경영진까지 넓히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산업재해에 피해를 입은 노동자와 원청업체 간 직접적인 고용관계가 인정되는 경우에만 의무와 책임을 지도록 돼 있는 법 조항은 여전히 그대로고, 하청업체가 경비 절감을 고려하지 않고 충분히 안전조치를 취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은 여전히 마련되지 않고 있다.
 
현재순 일과건강 연구원은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죽음의 배경에 최저가 낙찰제가 있고 ‘최적가' 낙찰제라는 대안이 있음에도 정부·정치권이 처벌 수위 강화에만 매달리는 이유는 소위 '토건족'에 있다”며 “건설업종에 유독 많은 산업재해 사상자가 발생하는 이유도 불합리한 도급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계속)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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