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황민규·곽보연·염현석기자] "대한민국 산업의 '근간'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반월·시화 산업단지의 비참한 현실은 우리나라 제조업의 맨 얼굴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더욱 심화되고 있는 대기업에의 종속과 막힌 자금줄, 인력 수급의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길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수도권 최대의 중소 제조업체 집결지인 반월·시화 산단은 70·80년대 우리나라 고속성장을 이끌던 산 증인이다. 당시 우리나라 산업의 심장부로 불리며 국가경제의 근간이 됐다. 제조업 중심의 산업화구조 때문이다.
아직 우리나라 산업단지 3위의 생산규모를 자랑한다고는 하나 성장 잠재력은 이미 꺾인 지 오래다. 입주기업의 98%가 1·2차 중소 협력업체로, 대기업에 기대 근근히 살아가는 실정이다. 혹자는 '딸린 식구'로까지 표현했다.
희망 없는 현실. 무심하게 돌아가는 공장 한켠의 녹슨 기계들이 산단 내에 들어선 1만5268개(한국산업관리공단 기준), 비공식적으로는 2만8000여개 제조업체의 현실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13일 안산시 반월지구의 정경. 우측에 노후한 산업폐기물 처리시설이 눈에 들어온다
◇심화된 대기업 의존도..막힌 금융권 돈줄
"연간 매출액이 540억원 정도지만 현대·기아차가 거래를 끊으면 우린 바로 죽어요."
반월지구에 위치한 K 전장 부품업체 대표의 말이다. K사는 1978년 자동차용 전장부품을 첫 생산한 명가다. 첫 거래처는 기아차였다. 대기업을 주요 거래처로 확보한 탓에 K사는 걱정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대마불사'의 신화가 깨졌다. K사 대표는 마치 악몽을 떠올리듯 "기아차가 도산할 줄 누가 알았겠느냐"며 "일감이 뚝 끊기면서 일주일에 사흘 출근해 간신히 기계를 돌렸다"고 말했다.
대기업에 생명줄을 맡기는, 이른바 의존도가 높은 1·2차 협력업체들이 산단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대기업 업황 하나에 생사가 갈리는 탓에 의존도는 더욱 심화됐다. "썩은 동아줄이 되는 순간 모두가 죽는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대기업 위주의 종속적 구조에서 벗어나고자 해외로 눈을 돌리는 중소업체들이 늘고 있지만 이마저도 현실적 난관에 부딪혀야 했다. 거래처를 다변화하기 위해 뛰어다녔지만 네트워크망이 부실한 탓에 박람회에 참가해야만 겨우 해외 바이어를 만날 수 있었다.
설사 바이어가 관심을 보여도 언어 장벽과 정보 부족 등으로 거래가 성사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았다. 또 다시 대기업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또 다른 벽은 유동성 확보였다.
시중 은행들이 하나같이 매출액을 기준으로 대출금을 산정하다 보니 급한 경우 제2금융권, 심한 경우 사채시장으로까지 내몰리게 됐다. 기술력이나 지적재산권 같은 무형자산은 은행 돈을 빌릴 때 고려대상(대출금 산정기준)조차 아니었다.
그렇다보니 특허나 원천기술을 보유하고도 매출액이 낮다는 이유로 돈줄이 막혔다. 연구개발과 설비투자 등 성장동력 확보에 소홀할 수밖에 없게 된 근원적 이유다.
한 업체 관계자는 "특허출원료나 시제품 개발비용 등 정부의 부분적 지원도 있지만 '단기적 수혈'에 불과하다"며 "금융권은 중소업체들의 가시적인 결과만을 볼 게 아니라 잠재력과 발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FTA, 장밋빛 전망만..후속대책은 '전무'
내수시장 가뭄에 목마른 중소업체들에게 미국 및 유럽과의 FTA(자유무역협정) 체결은 '오아시스'처럼 보였지만 현재까진 허상에 불과했다.
지난 3월 발효된 한미 FTA로 '즉시 관세철폐 품목'으로 지정된 자동차 부품업계는 정부의 장밋빛 전망까지 더해지며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수출로가 확보되면서 판매처를 다변화할 수 있고, 또 해외시장 진출의 첫걸음이 될 수 있다는 기대였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자동차 금형을 만드는 D업체 대표는 "FTA 수혜 업종에 자동차 부품이 포함됐지만 나아진 게 전혀 없다"며 부품 제조업 현실에 대한 정부의 수준 낮은 이해와 턱없이 부족한 지원을 탓했다.
실제 정부 차원에서 국내 자동차 부품업체 20개사를 모아 미국 바이어들과 미팅을 주선했지만, "해당 분야에 전문성 없는 정부 관계자들이 나서다 보니 부품 분야가 다르거나 요구조건이 안 맞는 업체와 연결해주기 일쑤였다"고 한 관계자는 전했다.
한미 FTA 발효로 2.6%의 관세가 즉시 철폐된 LED 산업 역시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반월지구에 입주한 LED 제조업체들은 하나같이 "아직까지 FTA 체결의 효과를 본 게 전혀 없다"며 정부의 소홀한 후속대책을 원망했다.
이는 해외 현지시장에 대한 기초자료조차 확보하기 힘든 중소 제조업체의 열악한 현실을 더욱 극단으로 내몰았다.
한 관계자는 "경쟁력은 되는데 정보가 없어서 해외시장에 엄두도 내지 못하는 제조업체들이 많다"며 "국내업체들의 제조 역량은 충분히 해외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수준인데 중소기업이 수출길을 개척하기는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정부 스스로도 이 같은 문제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 한국산업관리공단 경기지역본부 관계자는 그간의 노력을 설명하면서도 "FTA 효과를 피부로 느끼는 업체는 많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이 없다"..애써 키운 인력 대기업이 빼가
"외국인 근로자가 없으면 당장 문 닫아야 하는 공장이 반월·시화산단에 한둘이 아닙니다."
산단공 관계자는 "반월·시화 산단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 추산치가 6만명에 육박한다"며 "외국인 근로자가 이곳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상상밖"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말처럼 이곳 산단에서 만난 업체들이 호소하는 가장 큰 애로사항 중 하나는 '인력난'이었다.
자동차 부품업을 하는 K업체 대표는 "대졸자들은 일자리가 없다고 울상인데, 우리는 일하러 오는 청년이 없어서 울상"이라며 "수출 판로 개척을 위해서라도 외국어가 능통한 고급인력을 채용하고 싶은데, 현장 중심의 제조업이라는 이유로 다들 회피한다"고 말했다.
◇시흥 시화지구의 한 업체가 사원모집 공고를 내걸었다. '충원시까지'란 모집기간이 눈에 띈다. 이곳 중소업체들 대다수는 심각한 인력난에 몸살을 앓고 있다.
청년 인력의 공단 기피현상도 문제지만, 중소업체에 종사하며 실력을 갖춘 전문인력을 대기업에서 유출해 가는 게 더 큰 문제라고 업체들은 이구동성으로 지적했다. 애써 키운 현장 중심의 전문인력 유출은 사실상 중소업체가 보유한 기술력까지 통틀어 빼내가는 것과 같다는 주장이다.
실제 한 자동차 부품업체 관계자는 “몇 해 전 대기업으로 이직한 전문 기술자가 회사의 기술까지 가져가 큰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이는 그간 기술개발 하나에 매달려온 회사의 존립 자체를 흔드는 것이란 설명도 이어졌다.
한 업체 관계자는 "정부가 취업준비 중인 청년들을 전문지식을 갖춘 현장인력으로 양성해서 우리같은 중소업체들에게 연계해 준다면 서로에게 윈윈이 되지 않겠느냐"며 "중소업체들의 인력난 해결에 정부와 지자체가 발벗고 나서주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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