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홍규의 피지컬 AI)설명서를 읽히기 전에, 어르신이 로봇을 직접 켜게 해야 한다
제29회/ 최홍규 연구위원(EBS)·미디어학 박사
2026-10-15 14:09:38 ㅣ 2026-10-15 14:31:03
최홍규 연구위원(EBS)/ 미디어학 박사
 
석 달째 로봇이 상자 안에서 잠들어 있다. 자녀가 사 보낸 로봇청소기다. 어르신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설명서의 깨알 같은 글씨를 떠올리고, 잘못 만져 고장 낼까 봐 상자를 장식장 위로 올려둔다. 로봇을 깨우지 못하게 막은 것은 기술이 아니라 내가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의 부족이다.
 
시니어 인공지능(AI) 교육은 대개 두려움을 달래는 데서 출발한다. 안전하다고 설명하고, 어렵지 않다고 다독인다.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두려움이 줄었다고 해서 상자가 열리지는 않는다. 심리학은 이 믿음을 자기효능감, 줄여서 효능감이라 부른다.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스스로의 믿음이다. 두려움이 없는 어르신도 효능감이 없으면 상자 앞에서 멈춘다. 피지컬 AI가 가정으로 들어오는 시대에 시니어 교육이 먼저 길러야 할 것은 지식이 아니라 이 효능감이다. 로봇청소기든 돌봄 기기든 어르신이 상자에서 꺼내놓고 전원을 연결해야 비로소 일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캐나다의 한 연구팀이 2026년 3월 발표한 논문이 이 장면을 실험으로 옮겼다. 연구팀은 노인 18명을 두 집단으로 나눠 운동기구를 조립하게 하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말로 안내했다. 하나는 연구팀이 만든 음성 비서였다. 챗봇처럼 자유롭게 대화하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노인이 정해진 명령어를 말하면 조립 단계와 부품을 읽어주는 안내기다. 다른 하나는 사람이 전화로 일러주는 상황을 흉내 낸 음성 통화였다. 실제로는 연구자가 미리 녹음한 사람의 목소리를 노인의 요청에 맞춰 재생했다. 두 방식의 안내 내용은 같았지만, 음성 비서 쪽에는 조립 진행 상황을 확인하는 화면도 있었다. 조립은 노인이 직접 했다.
 
연구팀은 조립 과제를 해낼 수 있다는 믿음과 일상의 여러 어려움에 대처할 수 있다는 믿음을 조립 전후로 쟀다. 앞의 것을 조립 효능감, 뒤의 것을 일반 효능감이라 하자. 결과는 두 갈래였다. 조립을 마친 노인들은 두 효능감이 모두 올랐고, 안내자가 음성 비서든 전화 속 목소리든 점수는 다르지 않았다. 차이는 한 달 뒤에 나타났다. 음성 비서로 안내받은 쪽은 조립 전보다 높은 조립 효능감이 한 달 뒤에도 이어졌지만, 음성 통화 쪽은 오른 점수가 다시 줄었다. 일반 효능감은 두 방식 모두 한 달 뒤 오름폭이 이어지지 않았다. 연구팀은 안내자가 사람이 아닐 때 노인이 조립을 자기가 이끌었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라고 보았다.
 
필자는 이 결과에서 효능감이 어디서 오는지를 읽는다. 안내자가 기계든 사람이든 조립을 마친 노인의 효능감은 똑같이 올랐다. 연구팀도 이 상승을 안내를 따라 조립을 직접 해낸 성공 경험으로 풀이했다. 효능감을 키우는 것은 안내자의 정체가 아니라 끝까지 해낸 경험이다. 다만 일반 효능감의 오름폭은 작았고 한 달 뒤에는 이어지지 않았다. 성공 한 번은 조립 효능감은 올려도 일반 효능감까지 붙들어두지는 못한다. 첫 성공을 한 번으로 끝내면 안 되는 이유다.
 
한 달 뒤의 차이는 성공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묻는다. 연구팀의 풀이대로라면 기계의 안내를 받은 노인은 "내가 했다"는 느낌을 더 오래 간직한 셈이다. 말로 차례만 일러주는 안내자 앞에서 성공은 온전히 어르신의 손에 남는다. 답답하다고 대신 손을 대는 순간 그 성공은 안내자의 것이 된다. 효능감은 성공을 제 것이라 느낄 때 오래간다.
 
피지컬 AI 시대에는 이 점이 더 무거워진다. 화면 속 앱은 잘못 눌러도 뒤로 가기 버튼이 있다. 바닥에 놓인 로봇은 잘못 조립하면 덜컹거리고 멈춰 선다. 실패가 물건으로 남는 것이다. 어르신이 고장을 겁내는 것은 과민해서가 아니라 이 사실을 정확히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앞으로 어르신 곁에 오는 기계는 상자에서 꺼내 조립하고, 자리를 잡고, 전원을 연결해야 하는 물건이다. 첫 관문이 조작보다 앞선 설치에 있다. 연구팀도 조립이 안 되면 쓸 수 없다고 짚으며, 로봇은 설치가 까다롭기로 악명 높다고 적었다. 이 관문 앞에서 어르신이 자녀를 부르거나 상자를 닫아버리면 로봇이 아무리 똑똑해도 쓰이지 못한다. 반대로 어르신이 혼자 설치를 마치면 그 로봇은 처음부터 내가 들인 물건이 된다. 같은 로봇이 집 안의 짐으로 남을지 곁을 지키는 동반자가 될지는 첫 설치에서 갈린다.
 
자녀가 로봇을 사 보내는 마음에는 부모를 돕고 싶다는 선의가 있다. 그러나 선물이 어르신의 손을 거치지 않고 도착하면 그 선의는 숙제로 바뀐다. 설치 기사를 불러 대신 설치해 주는 것도 결과는 같다. 로봇은 집 안에 있지만 어르신의 것이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시니어 교육은 순서를 바꿔야 한다.
 
설명을 먼저 하고 손을 나중에 쓰게 할 것이 아니라, 손을 먼저 쓰게 하고 설명은 곁에서 거들어야 한다. 첫째, 시연을 길게 보여주기보다 작은 과제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어르신의 손으로 마치게 한다. 상자를 열어 전원을 꽂고, 건넨 첫인사에 로봇이 대답하는 소리를 듣는 정도면 충분하다. 해냈다는 감각은 해낼 만한 일에서만 생긴다. 둘째, 안내자는 말로만 곁을 지킨다. 강사든 자녀든 흔히 하는 실수가 답답해서 대신 해주는 것이다. 선의에서 나온 행동이지만, 그 순간 어르신은 주인공에서 관객으로 밀려난다. 셋째, 한 번으로 끝내지 않는다. 연구팀도 한 달 뒤의 점수가 처음 해낸 장면의 기억일 수 있다고 보고, 다른 물건을 조립하는 과제를 더해 확인해야 한다고 밝혔다. 비슷한 과제를 다른 물건으로 다시 해보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시니어 교육이 가르쳐야 할 것은 기계의 사용법만이 아니다. 어르신이 자기 손을 믿게 하는 일이 먼저다. 두려움은 설명으로 달랠 수 있어도 효능감은 설명으로 채울 수 없다. 효능감은 작은 일 하나를 끝까지 해낸 손에 남는다.
 
그러니 어르신께 건넬 첫 질문은 "쓸 줄 아십니까?"가 아니라 "해보시겠습니까?"다. 어르신 앞에 놓을 것은 더 친절한 설명서가 아니라 혼자 해볼 만한 첫 과제다. 로봇이 집에 들어서는 날은 택배 상자가 도착한 날이 아니다. 어르신이 그 상자를 제 손으로 열고 "내가 했다"고 말하는 날이다.
 
최홍규 연구위원(EBS)/ 미디어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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