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뉴스토마토 표진수 기자] 지난 1일 현대차·기아의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SDV) 개발의 산실인 남양연구소를 찾았습니다. 연구소 부지 안에는 주행시험로와 연구동, 각종 시험 시설이 촘촘히 들어서 있었고, 곳곳에는 위장막을 두른 시험차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차를 만드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소프트웨어로 정의되는 미래 자동차를 설계하고, 검증하고, 완성해 나가는 현장이었습니다.
와이어카를 활용해 차량 기능과 제어기 검증을 하는 연구원의 모습(사진=현대차)
SDV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자동차는 한 번 팔리면 끝나는 제품이 아니라 끊임없이 업데이트되며 진화하는 제품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전동화와 자율주행, 커넥티드 기술이 동시에 고도화되면서 차량을 구성하는 전기·전자 아키텍처와 소프트웨어 구조 역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졌습니다.
수백 개의 제어기가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고, 그 위에 소프트웨어가 차량의 성격과 기능을 결정짓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남양기술연구소는 차량 개발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고 있었습니다.
실물을 만들기 전에 가상으로 검증하고, 데이터로 품질을 예측하며, 설계 데이터만으로 부품을 제작하는 디지털 기반의 연구개발(R&D) 체계가 이곳에서 빠르게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날은 노바 랩(NOVA Lab), 드라이빙 시뮬레이터, 디지털 측정 센터(DMC), 적층 제조 솔루션 센터(AMSC)를 차례로 살펴봤습니다.
이날 공개된 공간 중 가장 SDV의 기술이 집약된 곳은 차세대 개방형 검증 플랫폼 ‘노바(NOVA)’ 랩이었습니다. 노바는 차세대 개방형 검증 자동화 랩(Next-generation Open Validation & Automation Lab)의 약자로, 실제 구동계, 배선, 친환경 연료전지 시스템 등이 내부에 그대로 노출된 '와이어카' 검증 업무를 한 단계 확장해 제어기 검증 분야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접촉식 측정 장비로 수치 측정을 하는 모습(사진=현대차)
SDV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차량 제어기의 수와 복잡도는 급격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곳은 그 복잡해진 전장 시스템을 실차 제작 이전에 먼저 걸러내는 최전선입니다. 배선과 제어기, 전장 부품을 차량 레이아웃과 유사한 테스트 벤치에 결합해 기능을 사전 검증하며, 현재 14대를 동시에 검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전 검증이 필요한 이유는 명확합니다. 제어기 소프트웨어가 처음 만들어지면 크고 작은 오류가 섞여 있기 마련인데, 이 상태 그대로 연구소의 품질 시험이나 성능 평가 단계로 넘어가면 그쪽에 과부하가 걸리기 때문입니다. 자율주행 기능을 검증하려는데 시험차 초기 단계에서는 그 기능이 켜지지도 않는 경우가 실제로 있습니다.
김상연 노바랩 파트장은 “이럴 경우 시험 단계에서 많은 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에, 실차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큰 문제점들을 저희가 먼저 걸러서 넘겨주는 게 저희의 역할”이라며 “크리티컬한 이슈들을 사전에 거르고 나면, 그 이후 실차 검증을 통해 바디·제어·전자 등 각 부문이 정기 검증을 이어가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검증 대상 부품은 차량 한 대 기준 300여 개, 커넥터는 최대 500개에 달합니다. 검증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뉩니다. 제어기와 배선이 제대로 연결됐는지 보는 회로 검증, CAN·LIN·이더넷 등 통신 신호가 잘 오가는지 확인하는 통신 검증, 램프·시트·공조 같은 기능이 실제로 정상 작동하는지 점검하는 기능 검증, 그리고 고장이 나면 관련 코드가 제대로 뜨는지 살피는 진단 검증입니다.
자동화 검증 툴도 자체 개발했습니다. 시나리오에 맞춰 신호를 차량에 인가하면 제어기가 정상 반응했을 때 초록색 체크박스가, 실패했을 때는 빨간색 X 표시가 뜨는 방식입니다. 통합 전원 장치를 활용하면 0볼트에서 50볼트까지 원하는 전압을 인가해 저전압·과전압 조건에서의 제어기 동작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외기온 센서에 별도 전압을 공급해 영하 5도 환경을 실내에서 재현하는 방식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주행 조건 검증을 위해서는 소형 다이나모미터를 새로 도입했습니다. 속도 변화에 따라 구름 저항·공기 저항 등 실제 주행 저항을 능동적으로 모사할 수 있어, 5km/h에서 아웃사이드 미러 자동 수납, 15km/h에서 오토 도어락 작동, 20km/h 이상에서 안전벨트 경고등 점멸 등 속도 연동 기능을 테스트 벤치에서 그대로 재현할 수 있습니다.
광학식 3D 스캐너로 수치 측정을 하는 모습. (사진=현대차)
자율주행 기능 검증을 위해서는 ADAS 시뮬레이터 시스템도 구성했습니다. 전방 카메라에 가상 도로 영상을 송출하는 카메라 시뮬레이터, 신호로 레이더 타깃을 모사하는 레이더 타깃 시뮬레이터(RTS), 조향 반력을 제어하는 MDPS 시뮬레이터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습니다.
이날 시연에서는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SCC)·후측방 경고(BCW)·차로 이탈 방지 보조(LKA)·전방 충돌 방지 보조(FCA) 기능을 순차적으로 검증하는 과정이 공개됐습니다. 전방 차량과의 충돌이 임박하자 FCA 1·2·3단계가 차례로 작동했고, 그때마다 묵직한 경고음이 울려 퍼졌습니다. 사전에 안내받지 못했다면 당황할 만한 소리였습니다.
자리를 옮겨 드라이빙 시뮬레이터 스튜디오에 들어서자 운전석을 중심으로 270도 화각의 거대한 곡면 스크린이 시야를 압도했습니다. SDV 시대에는 소프트웨어만큼이나 주행 성능의 완성도도 중요합니다. 실차를 만들기 전에 가상 환경에서 성능을 먼저 검증하고 육성하는 드라이빙 시뮬레이터는 그 핵심 도구입니다.
가상 환경에서 버추얼 검증 업무를 담당하는 정필영 주행성능컨셉개발팀 책임연구원은 “드라이빙 시뮬레이터는 가상 공간에서 차량의 성능 변화를 예측하고 평가하는 것은 물론, 성능 육성까지 가능한 장비”라고 소개했습니다.
직접 탑승해 보니 지역 도로 특유의 요철 패턴이 시뮬레이터 안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어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한 현대차 관계자는 “제가 운전해 혼자만 알 것 같은 도로의 요철들도 그대로 표현돼 있어 깜짝 놀랐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생생한 재현이 가능한 것은 현대차그룹이 남양기술연구소 주행시험장을 1mm 단위로 정밀 스캔해 노면의 경사와 요철, 과속방지턱, 아스팔트 질감까지 빠짐없이 데이터로 옮겨 담았기 때문입니다. 방대한 데이터 용량 문제는 세계 최초로 도입한 지형 서버(Terrain Server) 방식으로 해결했습니다. 차량이 주행하는 위치 주변의 데이터만 실시간으로 주고받는 방식이어서 초고용량 렌더링 데이터를 처리하면서도 지연 없이 자연스러운 주행이 구현됩니다.
이밖에도 디지털 측정 센터에서는 로봇 팔에 장착된 3D 스캐너가 차체 형상을 정밀하게 측정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품질 데이터를 수치로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적층 제조 솔루션 센터에서는 금형 없이 모델링 데이터만으로 빛과 열을 이용해 금속 또는 수지를 한 층 한 층 쌓아 올려 다양한 형상의 부품을 신속하게 제작하는 과정이 이어졌습니다.
현대차 관계자는 “남양기술연구소는 디지털 기반의 혁신 R&D 기술로 차량 개발의 방식을 새롭게 바꿔가고 있다”며 “이를 통해 현대차·기아는 소프트웨어 혁신을 넘어, 하드웨어 기술력과 완성차 품질까지 아우르는 기술 역량으로 미래 모빌리티 시대를 선도해 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화성=표진수 기자 realwater@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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