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신다인 기자] “자신에게 피해를 가하는 여성들로 인한 스트레스와 분노를 해소하고 여성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여성을 살해하기로 마음먹었다.”
2016년 5월17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 공중화장실에서 벌어진 이른바 ‘강남역 살인사건’ 1심 판결문 중 일부입니다. 당시 가해자 김성민(당시 34세)씨는 일면식도 없는 20대 여성을 흉기로 살해해 징역 30년을 확정받았습니다.
2017년 8월6일 오후 서울 강남구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열린 '여성혐오 살인 공론화 시위 및 왁싱샵 살인사건 규탄집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뉴시스)
다만 당시 법원은 이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서울중앙지법은 “여성을 혐오하였다기보다, 남성을 무서워하는 성격 및 망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피해의식으로 인해 상대적 약자인 여성을 대상으로 범행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럼에도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을 표적으로 한 범죄에 관해 사회적 논의를 촉발시켰습니다. 실제로 이후 벌어진 비슷한 형사사건의 판결문엔 ‘여성혐오’, ‘여성에 대한 적개심’, ‘불특정 여성 대상 범행’ 등의 표현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뉴스토마토>가 대법원 ‘판결서 인터넷 열람’ 시스템을 통해 2016년 이후 확정된 살인·살인미수 사건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범행 동기와 관련해 여성혐오나 여성에 대한 적개심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사건은 모두 8건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6건은 가해자가 피해자와 아무 관계가 없는 상태에서 벌어진 범행이었습니다.
법원은 최근 들어 여성혐오 범죄의 위험성을 보다 직접적으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의정부지법 고양지원은 지난해 8월 경기도 파주의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40대 여성을 야구방망이로 무차별 폭행한 20대 남성 사건에서 여성혐오 동기를 구체적으로 판시했습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여성에 대한 질투, 혐오의 감정(여성은 남성만큼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사회로부터 가치를 인정받고 연애도 쉽게 할 수 있다)을 품고 있었다”며 “길거리에서 잘 꾸민 듯한 여성인 피해자를 보고는 순간적으로 화가 난다는 이유로 생면부지의 피해자의 머리를 수회 가격했다”고 했습니다.
이어 “이러한 ‘묻지 마 범죄’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에 불안과 공포를 확산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비난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며 징역 7년을 선고했습니다.
법원은 2018년 전주에서 발생한 벌어진 여고생 벽돌 피습 사건에 대해서도 여성혐오 범행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당시 전주지법은 헤어진 여자친구를 떠올리게 했다는 이유로 범행을 저지른 20대 남성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하며 “여성 일반에 대한 혐오나 무차별적인 폭력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상황에서 불특정한 여성을 상대로 한 범행은 사회적 불안과 분열을 심화시킨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국여성의전화 관계자들이 2024년 11월25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여성 살해 규탄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하지만 사법부의 인식 변화에도 불구하고 법 제도는 보폭을 맞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양형 기준에 가중 요소로 ‘혐오’를 명시하는 범죄는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죄와 모욕죄 정도에 그칩니다. 살인이나 중범죄 영역에선 혐오 동기에 대한 별도의 양형 기준이 마련돼 있지 않은 셈입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 관계자는 “살인범죄의 경우 감경이 불가능한 특별양형인자로 제3유형인 ‘비난 동기 살인’을 두고 있다”며 “여기에는 무작위 살인이나 이에 준하는 범행 등이 포함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범행을 해당 유형으로 볼지는 재판부 판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현재 대법원 양형위원회 기준상 살인범죄 특별양형인자에는 제3유형으로 ‘비난 동기 살인’이 포함돼 있지만, 여성혐오나 특정 집단에 대한 적개심은 별도로 명시돼 있지 않습니다. 결국 혐오 동기를 양형에 어느 정도 반영할지는 재판부 재량에 맡겨져 있는 셈입니다.
전문가들은 혐오범죄에 대한 별도 논의와 양형 기준 정비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홍미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국내에서는 아직 혐오 동기에 대한 명시적 규정이 부족하다”며 “관련 판례가 축적되고 있는 만큼 양형 기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장임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도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공격하거나 살해하는 것은 전형적인 혐오범죄의 성격을 가진다”며 “해외처럼 특정 집단을 겨냥한 범죄에 대해 가중처벌하는 입법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혐오범죄는 인종·성별·성적지향·장애·국적 등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이나 적대감을 동기로 한 범죄를 뜻합니다. 미국·독일·캐나다 등은 혐오범죄를 사회적 약자를 겨냥한 차별과 폭력으로 보고 가중처벌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멕시코·과테말라·엘살바도르 등 일부 중남미 국가는 여성 살해 범죄를 별도로 규정하면서 ‘여성혐오에 기반한 살해’를 법률상 유형으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신다인 기자 shin123@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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