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우리의 진짜 내일을 위하여
2026-03-17 06:00:00 2026-03-17 06:00:00
1946년 이탈리아 로마의 한 골목. 델리아는 매일 아침 남편의 손찌검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딸의 결혼식을 준비하고, 시아버지를 봉양한다. 살림을 마치면 품삯을 얻기 위해 하루 종일 바쁘게 돌아다닌다. “밥값을 하라”며 윽박지르는 남편에게 갖다 바쳐야 해서다. 
 
“엄마는 왜 바닥 깔개 같은 취급을 받으면서 맨날 가만히 있어?” 딸 마르첼라의 눈에 착하고 성실한 엄마 델리아는 불쌍하고 동시에 한심한 사람이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폭력에 저항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을 수밖에 없어 참고 살았지만 그 ‘편지’를 받은 후에는 달랐다. 조용히 그러나 단호히 내린 선택. 그 계획을 무사히 실행하기 위해서 그녀는 기꺼이 참고 견디고 버텼다.
 
파올라 코텔레시 감독의 영화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2026)는 델리아가 딸 마르첼라가 살아갈 세상을 위해 어떤 용기를 내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이다. 영화 <서프러제트>(2015)가 투쟁의 최전선에서 몸을 던진 여성들을 담았다면,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삶 속을 비춘다. 역사의 거대한 물결은 시위대 안이나 연단 위에도 있지만, 이름 없는 수많은 델리아들의 일상 위에서도 흘렀다는 걸 말해준다. 
 
주지하다시피 지금의 우리에게 당연한 권리로 여겨지는 참정권이 과거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여성에게 말이다. 세계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인정한 나라는 뉴질랜드로, 1893년의 일이었다. 영국은 서프러제트 운동의 치열한 투쟁 끝에 1928년에야 완전한 동등 참정권을 보장했고, 미국은 1920년, 프랑스는 1946년 헌법에 명문화했다. 영화의 배경인 이탈리아도 1946년이었다. 스위스는 1971년에야 여성 참정권을 인정했다.
 
우리나라는 1948년 제헌헌법에서 남녀의 평등한 참정권이 보장됐다. 스위스보다 23년이나 앞섰지만 서구 여성들처럼 피를 흘리며 쟁취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우리는 이 권리의 무게를 충분히 묻지 않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2024년 기준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20%로 역대 최고치이지만 OECD 평균 33.8%에 한참 못 미친다. 2005년 공직선거법에 ‘지역구 후보의 30% 이상을 여성으로 추천하도록 노력하라’는 조항이 생겼지만 강제력이 없어 지금껏 단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다. 심지어 지방자치제 부활 이후 17개 광역자치단체장은 전부 남성뿐이었다. 이번 6·3 지방선거에서 ‘여성 최초’의 벽이 깨질지 두고 볼 일이다.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서십자각 일대에서 열린 2026년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제41회 한국여성대회에서 참석자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뉴시스)
 
숫자도 보잘것없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여성 정치’의 의미 상실이다. 여성의 정치 참여가 확대될 때 사람들은 기대를 품었다. 그동안 봐왔던 남성들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의 리더십을 말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에서 목격하는 여성 정치인들의 모습은 때로 실망스럽다. 생존을 위해 남성보다 더 거친 언어와 권력욕을 내뿜기도 하니까. 욕망과 권력 앞에서는 여성도 결국 남성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자주 깨닫게 한다.
 
코텔레시 감독은 흑백 화면 위에 현대의 힙합과 록을 얹었다. 그것은 ‘그때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의 이야기’라는 선언이다. 영화 속 델리아가 딸에게 더 나은 삶을 남겨주고 싶어했듯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딸들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를 원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이 더욱 묵직하게 다가온다.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 지금이 어제의 내일이 아니라 변함없이 오늘도 내일을 꿈꾸고 말하는 현실. 하지만 아직 절망을 입에 담지 않겠다. 델리아가 딸을 위하는 만큼이나 딸도 엄마를 열렬히 응원했기 때문이다. 그 응원은 희망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우리는 아직 ‘희망’ 한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다시 시작, 또 한 번 시작이다!
 
이승연 작가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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