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만성 염증은 현대 의학이 가장 오래 씨름해 온 난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세균이나 외상을 막아내기 위해 시작된 면역 반응이 멈추지 않고 이어질 때, 그것은 방어가 아니라 질병이 됩니다. 류마티스 관절염과 심혈관질환, 당뇨병, 만성 통증까지 서로 다른 병처럼 보이지만 그 뿌리에는 ‘꺼지지 않는 염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체가 스스로 염증을 멈추는 장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사람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처음으로 확인됐습니다.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연구진은 인체 내에서 염증 반응을 자연스럽게 종료시키는 생물학적 경로를 규명했다고 밝혔습니다. 지난달 국제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실린 이 연구는 염증을 유발하는 물질이 아니라 ‘염증을 끄는 물질’에 주목했습니다. 그 주인공은 지방에서 만들어지는 작은 분자인 ‘에폭시-옥실리핀(epoxy-oxylipins)’입니다.
과학자들이 만성 염증 치료법의 획기적인 전환을 기대할 수 있는 체내 염증 차단 스위치를 밝혀냈다. (이미지=챗GPT 생성)
지방이 면역을 멈춘다
염증 연구는 그동안 히스타민이나 사이토카인처럼 면역 반응을 촉발하는 신호에 집중돼 왔습니다. 그러나 연구진은 면역 반응이 끝나는 과정, 즉 몸이 공격 태세에서 회복 단계로 전환되는 순간을 설명하는 기전이 거의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이 연구의 교신저자인 UCL 데릭 길로이(Derek Gilroy) 교수는 “인체에서 염증이 가라앉는 과정을 실제로 지도처럼 확인한 첫 연구”라며 “보호성 지방 분자를 증가시키면 면역 전체를 억제하지 않고도 염증을 진정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연구는 건강한 성인을 대상으로 진행됐습니다. 연구진은 피험자의 팔에 자외선으로 사멸시킨 대장균을 소량 주입해 실제 감염과 유사한 염증 반응을 유도했습니다. 통증과 열감, 붓기, 발적이 나타나는 표준 실험 모델입니다. 이후 피험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 약물을 투여했는데, 한 그룹은 염증 시작 전 예방적으로, 다른 그룹은 염증 발생 후 치료 목적으로 약을 받았습니다.
투여된 약물은 ‘GSK2256294’라는 물질로, sEH(가용성 에폭사이드 가수분해효소)를 억제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이 효소는 에폭시-옥실리핀을 분해하는데, 이를 차단하면 인체가 가진 ‘염증 종료 신호’가 강화됩니다. 연구 결과는 분명하게 나타났습다. 약물을 투여받은 참가자들은 통증이 더 빨리 사라졌고, 만성 염증과 관련된 면역세포인 ‘중간형 단핵구’의 수치가 혈액과 조직 모두에서 크게 감소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피부의 붉어짐이나 부종 같은, 겉으로 보이는 염증 반응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염증을 억누른 것이 아니라, 염증의 성격 자체를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추가 분석에서 연구진은 ‘12,13-EpOME’라는 특정 에폭시-옥실리핀이 핵심 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 물질은 p38 MAPK라는 단백질 신호 경로를 억제해 면역세포가 만성 염증을 유발하는 형태로 변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합니다. 이 연구의 제1저자인 올리비아 브래컨(Olivia Bracken) 박사는 “이 기전은 면역 전체를 억누르지 않고 과잉 반응만 진정시킨다”며 “보다 안전한 치료 전략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현재 만성 염증 질환 치료는 스테로이드나 면역억제제, 생물학적 제제에 크게 의존합니다. 효과는 있지만 감염 위험 증가라는 부작용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이번 연구는 면역을 차단하는 대신 균형을 회복시키는 접근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그것도 동물실험이 아닌 사람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실험이어서 그 의미가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 사용이 늘면서 젊은 층의 손가락 류머티스 관절염 발병률이 높아지고 있다. 영국 대학들의 최근 연구는 인체가 스스로 염증을 멈추는 장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사진=뉴시스)
면역 정상화하는 치료로
연구진은 이 발견은 류마티스 관절염 및 심혈관 질환과 같은 질환의 치료제로 sEH 억제제를 시험하는 임상시험의 가능성을 열어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영국 관절염 협회(Arthritis UK)는 “염증과 통증을 멈출 수 있는 자연적 과정을 발견한 이 연구 결과를 보게 되어 매우 기쁘다. 앞으로 이 연구가 관절염 환자를 위한 새로운 통증 관리 옵션으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기대감을 표했습니다.
의학은 오랫동안 염증을 제거해야 할 적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면역학은 염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시점에 종료시키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이번 연구는 인체가 이미 그 장치를 갖고 있으며, 과학이 그 스위치를 찾아낸 단계에 들어섰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만약 후속 임상시험이 성공한다면, 면역을 억누르는 치료에서 면역을 정상화하는 치료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연구는 영국 관절염 협회의 지원을 받았으며, UCL(런던대학), 킹스 칼리지 런던, 옥스퍼드 대학, 퀸 메리 런던 대학, 미국 국립환경보건과학원(NIEHS)의 연구진이 참여했습니다.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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